음악적 표현주의에 대한 심층적인 체험, 그리고 그 너머의 사유
화음챔버오케스트라 현대음악 렉처 콘서트 시리즈 II: “마음으로 말하기: 표현주의” 비평
2020년 6월 21일(일) 오후 5시 LG아트센터
음악사에 등장하는 표현주의(expressionism)의 뜻을 암기해본 이는 많지만, 이 음악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게 들어본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연주자에게는 까다로운 악곡이며 청중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그저 듣기 싫은 현대음악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날 음악회에서 표현주의의 대표적 작곡가로 불리는 쇤베르크, 베르크의 대곡(大曲)들이 뛰어난 악단에 의해 실연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한발 더 나아가 이날 음악회는 송주호 음악평론가의 렉처와 함께 진행됐으며, 하이든이 작곡한 질풍노도 시기의 작품이 함께 연주됐고 서유라 작곡가의 신작이 발표됐다. 그리고 이를 통해 표현주의 음악이 어떤 방식으로 청중을 설득하며 또 종종 실패하는지, 이 음악이 가진 표현성의 근원이 무엇이고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 매혹을 불러일으키는지, 조성이 아닌 무조의 음악을 30분 이상 듣는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종류의 경험을 의미하는지 고민해 볼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표현주의 사조에 대한 단순한 이해를 넘어, 심층적인 체험 그리고 그 너머의 사유를 가능케 했다.
악장의 대비와 과감한 프레이징으로 만들어내는 ‘표현성’
하이든(F. Haydn, 1732~1809)은 <교향곡 “애도”>(Symphony No. 44 “Trauer-Sinfonie”) 안에 ‘빠르게-미뉴에트-느리게-빠르게’라는 독특한 악장 배치를 사용했다. 이런 시도는 일반적으로는 후기의 교향곡으로 이행하기 위한 과도기의 실험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이날 음악회에서는 이런 구성이 인접 악장 사이의 극단적인 빠르기 대조 및 질감 차이를 만들어냈고, 이를 통해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이를테면 3악장은 하이든이 자신의 장례식에서 연주해달라고 부탁했을 정도로 온화하고 감미롭다. 반면, 이어지는 4악장은 빠르고 각진 선율을 쉴 새 없이 튜티(tutti)로 연주하며, 대위법적으로 복잡한 음향과 트레몰로 패시지를 들려준다. 그리고 이 두 악장이 연이어 연주됨으로써 극렬한 대비를 이룬다.
이런 흐름은 음악이 텍스트 없이 무언가를 표현하고자 할 때 서로 대조되는 음향덩어리를 나열해 이를 충돌시키는 것이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이날 음악회에서는 느린 악장은 보다 더 투명하고 감미롭게, 그리고 빠른 악장은 보다 격정적으로 연주됐다. 이런 해석은 내면의 감정을 밖으로 표출한다는 의미의 ‘표현주의’와 유사한 맥락을 공유한다. 결과적으로 하이든의 ‘질풍노도’ 양식은 음악적 대조와 강렬한 감정적 분출을 통해 20세기의 표현주의와 가깝고도 먼 연결고리를 형성하게 되었다.
부정한 것을 정화하고자 하는 조성의 의지
쇤베르크(A. Schönberg, 1874~1951)의 작품 안에서 ‘표현주의’란 1908년 이후 작곡된 <공중 정원의 책>(1908/9), <세 개의 피아노 작품>(1909), <기대>(1909) 등을 지칭한다. 이런 작품 안에서는 모티브-테마 발전기법이 포기되며 형식의 부재로 인해 짧은 길이의 곡이 등장하고, 불협화의 음향이 특징적이다. 반면 1899년 작곡한 <정화된 밤>(Verklӓrte Nacht)은 30분 정도의 긴 길이로 그 안에 다섯 개의 섹션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중 한 섹션은 소나타형식으로 분석할 수 있다. 또한 음향의 상당 부분에서 후기낭만주의의 확장된 조성을 들려준다. 엄밀히 말해 <정화된 밤>은 표현주의에 속하는 곡이 아닌 것이다.
다만, 이날 음악회의 청중은 <정화된 밤>을 들으며 조성의 음향이 표현주의로 ‘향하는’ 순간을 분명히 목격할 수 있었다. 이런 체험은 이 음악이 기반하고 있는 데멜(R. Dehmel)의 시가 가진 독특한 서사에 기반하며, 이에 대한 정보를 연주 전 렉처를 통해 상세히 숙지했기에 가능했다.
<정화된 밤>은 한밤 중 숲을 걷는 연인에 대한 묘사로 시작한다. 얼마지나지 않아 여자는 남자에게 자신이 다른 이의 아이를 임신했노라 고백한다. 여자의 부정(不正)에 대한 음악적 묘사는 여성적인 테마를 ’반음계‘로 표현하던 전통적인 관습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증4도와 넓은 도약, 감화음이 계속해서 등장하며 이것이 변형·반복되면서 거대한 섹션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멀미를 일으킬 정도의 음정적·화성적 혼미함으로 진행된다. 예컨대 이런 날카로운 소리들은 그녀의 발언을 ‘부정한 것으로 청취하는’ 청자로서의 관점이 반영된 것으로서, 여자의 고백에 대면한 남자의 심리적 충격을 조성의 ‘경계에 위치한‘ 소리로 표현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에 뒤따르는 남자의 반응이다. 남자는 자신이 이 여자의 죄를 용서하고 뱃속의 아이가 밤의 기운 안에서 ‘정화’(淨化)되었노라 선언한다. 이 지점에서 소름이 돋을 정도로 또렷하고 당당한 ‘장3도’ 음정이 출현하며, 남자의 발언 전체가 지극히 달콤한 조성 어휘로 등장한다. 특히 이날 공연에서는 연주자들의 표현력으로 인해 이 부분이 지극히 투명하고 호소력 있는 음향으로 구현됐으며, 작품 전체의 클라이맥스와 같은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즉, 곡 초반에 등장했던 길고 긴 ‘부정의 고백’ 전체가 이에 뒤따르는 ‘남자의 용서’ 안에 잠재워지는 구도로 청취된 것이다. 반면 조성어휘로 구성됐던 네 번째, 다섯 번째 섹션에 대한 연주자들의 과도한 표현 욕구는, 아이러니하게도 여자의 죄를 정화하고 또 지우고자 하는 행위의 힘겨움, 즉 과장된 움직임으로 고군분투하는 남자의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매혹적인 조성 안에 양가적인 느낌이 발생한 것이다.
남자의 의지대로 부정은 정화될 수 있었을까? 그 답은 1900년을 기점으로 음악계를 장악해버린 무조음악이 보여준다. 1899년의 어느 시점에만 해도 ‘정결한 조성’으로 그 불안한 ‘씨앗’을 잠재울 수 있지 않을까하는 의구심이 들었겠지만, 잉태된 씨는 계속해서 자라나 걷잡을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1899년의 시 속 남자도 본능적으로 이를 알고 있었을 터, 그랬기에 정점에 이른 조성의 아름다움으로 증4도와 감화음으로 구성된 음향 전체를 ‘해결’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20세기의 음악사 안에서, 그리고 이날 공연장을 나섰던 청중의 머릿속에서도, 여전히 남아 떠도는 소리는 ‘날카롭고 예민한’ 울림이었다. 이는 무조음악이 실제로 갖고 있는 어떤 ‘힘’을 증명하며, 음악사가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케 한다.
그러나, 여전히 ‘한나의 이니셜’을 손에 쥐고 음악을 청취하는 사람들
베르그(A. Berg, 1885~1935)의 <서정조곡 중 세 곡>(Drei Sätze aus der Lyrischen Suite, 1928)은 본래 현악사중주를 위해 작곡된 <서정 조곡>의 몇몇 악장을 추려 현악합주 버전으로 엮은 것이다. 이 작품 안에는 원숙한 음렬 작법과 함께 자유로운 무조로 구성된 음향이 혼재하며, 세 개의 악장이 각각 특징적인 주법과 모티브를 토대로 뚜렷하게 나누어진다. 또한 원곡의 편성이 확대된 상태이기에, 베르크 특유의 섬세하고도 강렬한 음악 진행이 더욱 강화된 채 청취된다. 하지만 이날 음악회에서는 객석의 청중이 작품 안에 흐르는 몇 개의 음렬을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모든 음의 진행과 음악의 거시적인 방향성을 귀로 인지하기는 어려웠다. 작품을 연주했던 연주자 역시 이 작품에 어떤 방식으로 다가가야 할지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지점에서 <서정조곡 중 세 곡>에 대면한 청중이 의지할 수 있는 몇몇 도구를 추가로 떠올려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음악사의 긴 흐름 가운데 우뚝 선 작곡가 베르크의 권위 그리고 정전(正傳)으로서의 작품 개념이 언급될 수 있다. 이날 음악회에서도 음악을 이해하지는 못했을지언정, 그 책임을 작품에 돌리는 청중은 없어보였다. 이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열띤 태도로 작품에 다가가고자 노력했다. 또 다른 도구는 베르크가 내연녀 한나(Hanna Fuchs-Robettin)의 이니셜을 따서 만은 A-B-H-F 모티브다. 이 모티브는 음렬에 비해 길이가 짧기에 암기가 용이하며, 특정한 ‘서사’를 바탕으로 음악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해준다.
하지만 작품의 ‘권위’나 ‘내연녀의 이니셜’이 음악 청취의 중요 도구가 되는 상황은 표현주의 사조가 등장한지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 자신의 음악내적 구조만으로는 청중을 설득하지 못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쇤베르크가 꿈꿨던, 평범한 사람이 음렬로 쓰인 선율을 흥얼거리는 세상은 오지 않았고, 미래의 청중 역시 이 음악을 마주할 때 여전히 음악외적인 힌트를 손에 꼭 쥐고 있는 것이다.
서유라의 <컴파운드>(2020, 화음프로젝트 Op. 209)
서유라의 <컴파운드>는 동시대 작곡가의 감각 안에서 ‘표현주의’라는 테마가 어떤 형태로 상상되는지 보여준다. 첫째, 이 작품은 각기 다른 주법으로 연주되는 다채로운 풍경을 차례로 들려준다. 둘째, 하나의 음향은 동일한 형태의 음형과 아티큘레이션을 갖는 성부의 겹침으로 구성되며, 각 성부의 음형들은 수직적으로 미세하게 엇갈리며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일부 섹션에서 베이스 성부는 독립적으로 움직인다. 셋째, 장3도를 넘는 넓은 음 공간을 느리게 잇는 글리산도가 자주 등장한다. 이런 글리산도는 두 음 사이를 천천히 반복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넷째, 12음을 모두 들려주거나 12음에서 한 두 개의 음이 제외된 음군으로 특정 섹션의 화음을 구성하며, 선율이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과 상관없이 화성의 흐름이 정지되어 있거나 느린 경우가 많다.
이런 특징들이 결합해 이 작품을 ‘표현주의’의 기시감 안에 머물게 한다. 이 경우 <컴파운드>와 ‘표현주의’의 연속성은 단지 무조성 그 자체에만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작품 초입에 등장하고 이후에도 자주 등장하는 글리산도 섹션은 음향적인 ‘해결’이나 ‘완전함’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으며, 음악 전체를 해결되지 않는 불안한 풍경 그 자체로 들려준다.
예컨대 글리산도 섹션들은 회색구름이 한 자리에 머무르며 시시각각 변모하는 그 내부를 드러내 보이는 것 같다. 하나의 화음을 글리산도로 느리게 반복하고 또 미끄러지듯 겹침으로써, 즉 모든 성부가 음정적·리듬적으로 미세하게 엇갈렸다가 일치하는 진행을 반복함으로써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느낌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어두운 꿈을 연상시킨다. 피치카토와 하모닉스, 꼴레뇨 바투토(col legno battuto) 등으로 구성된 메마른 음향이 이런 섹션과 대조되는 것도 황망한 느낌을 더한다. 배경처럼 흐르던 음향 가운데에서 불현듯 나타나 매혹적인 선율을 들려주던 독주 바이올린도 기억에 남는다. 이런 모든 흐름은 무조음악이 뿜어내는 아름다움과 에너지의 근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한참을 다시 고민하게 만들었다.(글 이민희/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