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화음 프로젝트 아카데미 '에코챔버 사운드 이펙트 서울 2019'
11월 29일 (금) 오후 7시 / 11월 30일 (토) 오후 3시
대안공간 루프
<광장 속 밀실의 세계>
광장 속 밀실
“나는 친구들과 길을 걷고 있었다. 해 질 무렵이었다. 한쪽으로는 시가지가 펼쳐져 있고 아래로는 강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갑자기 구름이 핏빛처럼 새빨갛게 물들었고, 한 줄기 우울함이 나를 엄습했다. 친구들은 계속 걷고 있었지만 나는 전율을 느끼며 멈춰 섰다. 마치 강력하고 무한한 절규가 자연을 꿰뚫으며 지나가는 것 같았다.” 뭉크는 그의 대표작 ‘절규’를 그리게 된 계기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절규’의 주인공은 양손으로 옆얼굴을 감싸고 있다. 커다란 손으로 귀를 막았지만, 그를 꿰뚫고 지나가는 절규는 막을 수 없다. 주변 세계는 심하게 왜곡된 형태로 그를 향해 무너지고 있다. 그는 그를 압도하는 절규 속에 갇혀있다. 왜곡된 세계에서 울려 퍼지는 강박적이고 고통스러운 소리다.
2019년 화음 프로젝트 아카데미의 첫 공연, ‘에코 챔버’는 광장 속, 제각각의 밀실에 갇힌 이들의 외침을 듣는 자리였다. 누구도 동일한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할 수는 없다. 이들은 같은 세계에 있지만 모두 다른 세계를 보고 듣는다. 이들에게만 느껴지고 들리는 강박적이고 고통스러운 소리가 공간을 관통했다. 모두의 광장은 개인의 밀실이 되고, 개인의 밀실은 광장을 향해 열렸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중장기 지원 사업으로 작곡가들과 함께 ‘탐구와 실험’이라는 두 개의 큰 카테고리로 2019년부터 2021년까지 3년에 걸쳐서 화음프로젝트 아카데미를 진행한다. 이번 연주는 그중 실험 카데고리에 속한 공연이다. 연주가 행해진 대안공간 루프의 기획전시, ‘사운드이펙트서울 2019’의 주제인 ‘에코 챔버’를 음악창작의 실험주제로 선정했다. 공모를 통해 뽑힌 만35세 미만의 젊은 작곡가 7명의 작품이 이틀에 걸쳐서 초연됐다.
전시와 창작곡의 주제가 된 에코 챔버는 인공적으로 소리의 잔향감을 만드는 공간을 의미한다. 이 용어는 2000년대 이후에 인터넷 이용자가 선호하는 정보를 수집해 각 개별 이용자가 선호할 것으로 추정되는 정보만 걸러서 제공하는 상황에도 쓰이고 있다. 이러한 서비스는 결과적으로 제한된 정보가 마치 전체인 것처럼 이용자에게 전달되고, 이용자를 각자의 거품 안에 가둬버린다. 디지털 미디어가 개개인의 성향을 존중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다른 관점을 가진 목소리들이 차단되고 유사한 목소리들에만 둘러싸일 위험이 있다. 결국 개인은 독백이 거대하게 메아리치는 갇히게 되는 것이다.
전시와 공연이 진행된 대안공간 루프는 1999년 한국 최초의 대안공간으로 홍대 지역에서 출발했다. “열린 시민사회에서 동시대 문화 예술이 수행해야 하는 역할이 고유하다는 믿음”을 표방하는 대안공간 루프는 “모두가 공유하는 공공적이며 공동체적 성격”을 지향하며, “모든 시민에게 열려 있”고자 한다. 이러한 정신은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문화의 공공성에 깊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자 하는 화음의 정신과 맥을 같이 한다. 이 두 예술단체는 현대 사회·문화·예술의 중요한 이슈를 예술작품을 통해 실험적으로 탐구하며 그 결과물을 사회와 공유하며 새로운 인식을 촉구하는데 가치를 둔다. 모두에게 열려있는 대안공간은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홍대 거리에서 찾기 매우 어려운 장소에 숨어 있었다.
“이곳의 소리가 들리나요?”
공연은 이틀에 걸쳐서 열렸다. 첫 날인 11월 29일에는 세 개의 작품이, 30일에는 네 작품이 선보였다. 첫 곡은 작곡가 권옥현의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Bias>로, 작곡가는 현대음악이 청중에게는 외면 받고 연주자에게는 무시 받으며 사회에 지속적인 반향이나 여운을 남기지 못하는 현상을 작품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그는 현대음악이 귀에 거슬리는 이해할 수 없는 소리라는 시선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지 폭로하고자 했을까? 편견의 폭력성을 나타내는 방식은 가차없었다. 바이올린을 고문하는 연주자의 표정은 고통스러웠고 바이올린은 쉴 새 없이 괴로운 비명을 질러댔다. 칼에 베이는 듯 날카롭고 소름끼치는 소리가 밀폐된 공간 안에서 위태롭게 울렸다.
두 번째 작품은 작곡가 서지웅의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의 현악 3중주곡 <... Moments Musicaux ...>이었다. 줄임표 부호가 앞뒤로 붙은 특이한 작품 제목이 암시하듯 음악은 침묵에 둘러싸여 있었다. 작곡가는 빛을 없앤 어두운 공간을 연출함으로써 순간순간 생성되고 사라지는 소리의 파동에 더욱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1악장은 느린 단선율의 다이내믹의 변화가, 2악장은 화음의 동적인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세 악기의 긴 여운이 사라진 후에도 연주자들은 동작을 멈춘 상태를 오래 유지했다. 시각적 자극이 사라진 침묵을 경청할 때 청각이 가장 예민해지는 것을 실감했다.
첫 날 마지막 곡은 현악 3중주를 위한 <Incompleteness>였다. 작곡가 유소정은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에서 작품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밝혔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모순적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그것이 가장 엄밀한 수학이라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모순 없고 일관적인 것을 지향하지만, 그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완벽이라는 관념을 강박적으로 추구하고 그 과정에서 끝없는 불안에 시달린다(공교롭게도 괴델 역시 평생 극심한 불안신경증에 시달렸다). 이 작품에는 작곡가의 완벽을 향한 집념과 좌절의 과정이 담겨 있다. 흔들리는 음정들, 불안한 음향, 날카로운 외침이 복잡한 진행에 얽혀서 끊임없이 발버둥 쳤다. 완벽을 추구하며 스스로를 극단으로 내몰지만, 완벽해지려고 할수록 불완전성을 더 강하게 느끼면서 좌절을 겪는 현대인의 신경증적인 내면의 초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의욕적인 작품이었다.
11월 30일에는 네 개의 작품이 선보였다. 작곡가 나상윤의 현악4중주와 오보에를 위한 <Reverberation>은 잔잔한 바다에서 부드럽게 일렁이는 파도의 움직임을 연상시켰다. 현악4중주는 단순한 선율을 긴밀하게 주고받으며 너울너울 펼쳐졌다. 이 흐름은 오보에의 등장으로 잠시 멈추고 파문이 일었지만, 오보에 또한 이들의 움직임에 곧 동화돼 하나로 어우러졌다. 가벼운 울림과 경쾌한 움직임이 반복되며 연속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이 작품은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좁은 공간에 갇힌 느낌 보다는 소리의 반향을 아름답게 살리며 전체 공간을 감싸는 느낌을 전달함으로써 단순하지만 차별화된 효과를 만들었다.
작곡가 장승현의 현악4중주를 위한 <Intention of Slowdown>은 작곡 의도가 신선했다. 작곡가는 인터넷에서 우리가 정보를 수용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하고자 했다. 작품에는 세 개의 특징적인 내용이 나타난다. 먼저 자신이 추구하는 의지, 다음으로 그 의도나 의지와 상관없는 외부 요소들의 강제적 개입, 그리고 마지막으로 처음의 의도를 상기하고 돌아가고자 하지만 이미 왜곡되고 변질된 상황이 그것이다. 이 작품은 의지가 둔화되는 과정에서 겪는 혼란 그 자체를 표현하고 있다. 강한 의지는 하나의 리듬과 선율에 동화되고, 때로는 저항자체를 포기한 채 목적 없이 둥둥 떠다니기도 한다. 간간히 들리는 개성적인 목소리는 곧 다른 목소리에 묻힌다. 이 흐름에서 벗어나려고 할수록 더 깊숙이 휩쓸려간다. 이 모든 과정에서 겪는 소모는 매우 크다.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정보의 바다에 휩쓸린 자아는 결국 무기력한 상태가 된다. 이것은 자아가 다른 세계를 만나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아를 상실하는 과정에 대한 것이다.
작곡가 이세영의 피아노 독주곡 <be broken...> 역시 신랄한 표현에 초점을 맞췄다. 작곡가는 소셜 미디어가 제공하는 정보에 현혹되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잊은 채 계속 끌려 다니는 생각과 감정을 주제로 작업했음을 밝혔다. 이를 위해 두 개의 대조적인 음악적 아이디어, 즉 길게 울리는 화음들과 작고 날카로운 조각들로 부서진 선율적 아이디어를 교차하며 사용했다. 부서지고 다시 세우는 과정이 반복되는 가운데 길게 머무르는 화음들은 때로는 선율들이 강하게 부딪히는 벽이 되고 때로는 속도를 제어하는 장치로 작용했다. 선율은 사소한 것에 집요하게 파고들거나, 분열돼서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맹목적으로 질주한다. 긴 화음으로 잠시 속도를 늦춰보지만 파편화를 통제할 수 없음을 확인할 뿐이다.
마지막 작품은 작곡가 전다빈의 <언젠가, 그것은 다시 돌아오게 될거야.>로 플루트, 클라리넷, 바이올린, 첼로, 그리고 피아노를 위한 작품이다. 제목이 내포하고 있듯, 이 작품은 소리의 반향과 공명에 집중했다. 작곡가 전다빈은 에코 챔버의 개념을 두 개의 범위에 적용시켜 구현하고자 했다. 하나는 인공적으로 소리의 잔향감을 만드는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그랜드 피아노의 페달이 만드는 음향 공간에 악기들의 소리를 넣었을 때 발생하는 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다른 하나는 소셜 미디어에서 이용자의 선호도에 따라 편향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현상을 나타내기 위해 정보가 쌓이고 그것에 대한 반향이 표출되는 일련의 상황을 음악으로 풀어보고자 했다. 이 작품은 실제 소리의 효과보다는 개념을 구현하는 실험에 가까운 작품이었다. 피아노의 울림으로 만들어지는 제한된 공간에 다양한 소리들이 뒤섞여 공명하게 만드는 과정에서 플루트와 클라리넷이 피아노의 울림판을 향해 몸을 돌려서 연주하며 편향된 소리라는 개념을 시각적으로 연출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밀실의 희망
화음 프로젝트 아카데미의 첫 번째 실험인 에코 챔버는 주제 자체가 난제였다. 이 사회·문화 현상을 이해하고 작품으로 표현하는 과정 자체가 힘든 실험이고 도전이었을 것이다. 젊은 창작자들은 난해한 개념에 갇힌 느낌이었을까? 모호한 개념 이해는 애매한 결과물로 이어진다. 연주에 앞서 작곡가들이 간략하게 작곡 의도와 작품 내용에 대해 설명했는데, 실제 작품에서의 표현과 전달력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의문점과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지만 이 젊은 창작자들이 이 프로젝트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제한된 세계에 갇혀 있는지 날카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면 이 실험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본다. 자신의 세계에 갇혀서 외부와 소통의 어려움을 겪는 것은 비단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침묵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새로운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
밀실의 진정한 공포는 아무도 내가 갇혀있다는 것을 모른다는데 있다. 아무도 나의 절규를 듣지 못하는 것에 있다. 그렇지만 밀실의 소리가 광장에 울릴 때 시대와 새로운 공명이 시작된다. 각자의 밀실에서 숨죽여 고통 받는 이들이 보내는 반향이다. “당신이 지옥 한가운데 있는데, 주변의 예술이란 것들은 텅 빈 미소를 지으며 여기가 천국이라고 속삭이죠. 그때 불현 듯 ‘아니야, 우리는 고통 받고 있어, 그것도 아주 심하고 고통 받고 있다고!’라고 외치는 음악을 만났다고 생각해보세요. 당신의 말을 들어주고 당신을 대변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너무 기쁜 나머지 울고 싶어지는 겁니다.” 정치적 폭압으로 인한 심리적 위기 속 투쟁과 고뇌를 담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 초연 현장에 있던 한 러시아 음악인은 이렇게 말했다.
온갖 심각한 문제가 각자의 밀실에 숨겨진 이 시대에 귀에만 듣기 좋은 음악은 가슴 깊이 가닿을 수 없다. 그렇다고 현대음악이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도 결코 아니다. 귀를 닫으며 마음까지 닫은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젊은 창작자들이 고통 받는 자기 자신을 대면하면서 작품을 쓴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폐쇄성에서 탈출하겠다는 의지이며 소통을 향한 노력의 표현이라고 본다. 그것이 창작 세계의 벽에 부딪치며 외치는 다소 서툴고 거친 절규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극한의 공포에서도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밀실에서 작품을 쓰면서 자신을 살려냈다. 그랬기 때문에 이 생존자의 외침은 같은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구원의 메시지가 될 수 있었다. 미치거나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있다는 외침, 나와 너, 우리가. 각자의 마음의 감옥-밀실에서 해방되는 진정한 유대감은 여기에서 탄생한다. 여기에 밀실의 희망이 있다. 살아남은 이들은 이제 어떤 이야기들을 들려줄 것인가.
서주원 (bwv1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