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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2016 화음 프로젝트 페스티벌 평론 위촉] ‘畵音’의 정체
송주호 / 2016-08-16 / HIT : 1413

‘畵音’의 정체

 

 

글|송주호(음악칼럼니스트/화음쳄버오케스트라 자문위원)

    

 

클래식의 양면성

‘클래식’, 즉 ‘고전’이라는 단어는 르네상스의 기반이었다. 당시 클래식이라 함은 고대 그리스의 비극을 뜻하는 것이었다. 인문학(철학)이 보급되면서 사람들의 사고가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그 근간이 고대 그리스의 비극, 즉 신의 이야기인 ‘신화’라는 것은 아이러니처럼 보인다. 물론 옛 그리스의 신들이 기독교의 신을 대체했다는 것은 아니고, 의인화된 신들과 신들이 바라보는 인간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고찰했다. 이것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일종의 자각(自覺)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르네상스 말기인 16세기 끝자락에 이르러 음악에도 영향을 주었고, 오페라의 탄생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즉, 오페라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을 재현해보자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최초의 오페라로 알려진 자코포 페리의 <다프네>(1597) 이후 여러 오페라들이 신화 이야기를 토대로 작곡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페라를 통해 시도된 시각적인 극과 청각적인 음악의 만남은 굉장한 감각적 효과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곧 모방작들이 쏟아졌고, 이탈리아 전역에서 수없이 공연되었다. 여기에 몬테베르디가 <포페아의 대관>(1643)을 통해 신화가 아닌 역사물에서 소재를 찾는 도발을 감행하면서, 오페라는 과거의 재현을 넘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수 있었다.

초기 오페라는 음악극 수준으로서 동료들이 모여서 상연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대형화 되고 전문화 되면서 쉽게 무대에 올릴 수 없고 또한 자주 볼 수 없는 장르가 되자, 기악음악은 이에 대한 대리물로서의 역할이 요구되었고, 이후 클래식 음악은 이러한 무대극의 연장으로서 발전했다. 음악적 형식의 완성과 해체의 연속은 바로 그러한 역할을 담당하기 위한 고민의 결과와 다름 아니다.

    

 

잃어버린 반쪽 찾기

그런데 20세기에 와서 이러한 노력이 처참하게 무너지고 만다. ‘대량복제’라는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개념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중’이라는 개념 또한 이에 발맞춰 탄생한다. 대량복제는 다양한 분야에 적용되었는데, 무대극이 대량복제된 형태인 영화가 대중에게 보급됨으로써 영화가 시각적 자극의 주인공으로 들어앉았다. 갑자기 시각적 기능을 잃은 음악은 대중에 야합함으로써 대량복제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오늘날 대중음악이라고 하는 분야를 확립했다. 음반이나 음원뿐만 아니라 대중음악의 공연에 프로덕션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도 대량복제의 실현이라는 속성 때문이다.

하지만 ‘클래식’이라는 분야에 남은 이들은 대중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 방법으로 고전으로서의 (혹은 예술로서의) 가치를 유지하려고 했다. 이렇게 해서 ‘현대음악’이 탄생했고, 쇤베르크는 ‘사적 모임’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시각적 기능을 상실했다는 점을 대중과 거리를 두어 ‘고급문화’라는 지위를 획득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사실 상실했다기보다는 박탈당했다는 표현이 옳다. 그들의 공연 방식은 과거와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지만, 대중이 원하는 시각적 자극의 수위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의문을 품고 새로운 시도를 벌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음악의 시각적 기능을 회복하고자 하면서 대량생산을 거부하는, 클래식 예술과 대중 콘텐츠의 사이에 놓이는 ‘인터미디어’(intermedia)적인 발상으로 접근했다. 소리와 퍼포먼스, 소리와 그림, 소리와 영상 등의 결합은 20세기 초에도 있었지만 인터미디어적인 개념으로서 발현된 것은 20세기 중엽에 들어서였다. 1965년 딕 히긴스에 의해 언급된 ‘인터미디어’는 여러 장르를 공존하는 것을 넘어 화학적으로 결합시킴으로서 또 다른 복합적 형태를 갖는 탈장르적 작품의 특징을 설명하는 용어였다. 그가 플럭서스 예술가였던만큼 플럭서스와 해프닝을 설명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지만, 20세기 말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하나의 예술적 표현 방법으로 일반화되었다. 인터미디어적인 작품들은 관객들에게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자극을 주었으며, 현실을 초월한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畵音의 오늘

하지만 유럽과 미국에서 나타난 이러한 움직임은 국내에서는 그다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재대로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인데, 물론 이것이 잘못은 아니다. 각 나라 혹은 각 민족은 각자의 역사와 문화를 갖고 있기에, 타 국가 혹은 타 민족의 활동을 이해한다는 것이 오히려 기만일 수도 있다. 게다가 예술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못했던 당시 국내의 상황도 참작된다.

현시점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육이라는 과정이 요구된다. 왜 사티는 <가구음악>(1918)의 네 마디를 무한히 반복하라고 했을까? 존 케이지는 왜 피아노 앞에 그냥 앉아있었을까? 백남준은 왜 TV를 개조했을까? 오를랑은 왜 자신의 성형수술을 생중계했을까? 백남준의 표현을 빌면, 이들 ‘고급 사기꾼’들이 벌인 사기 행각을 검거하려면 그들의 활동 배경을 탐구해야 한다.

물론 교육은 소수의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간단한 것이 아니다. 사회의 문화 수준을 이러한 현상들을 수용할 수 있는 정도로 끌어올린다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음쳄버오케스트라는 이 땅의 역사와 문화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주어진 공간에서 벌어지는 청각과 시각의 동시적인 자극은 분명 관객들의 새로운 지각을 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또한 청각적 자극이 벌어지는 시간 동안 시각에서 벌어지는 미술 작품을 바라보는 동적 움직임은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한다.

하지만 이 점은 특별한 점이기도 하지만, 음악 연주와 미술 작품의 물리적 병치는 태생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2016년 5월 5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열린 ‘그림책 음악회’은 이를 잘 보여주었다. 객석의 관점에서 그림이 작게 보이기 때문에 시각의 동적 움직임이 이루어질 수 없는 상태였다. 따라서 그림은 매우 짧은 시간에 파악이 되고 말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의 새로운 경험이 불가능했다. 관객들은 다음 그림을 보고 싶다는 욕구가 나타났고, 음악은 그림 감상을 방해하는 요소로 전락하고 말았다. 즉, 청각과 시각의 병치는 둘을 융합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어색한 공존으로 받아들여지고 만다. 연주홀이라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이 경우 시각에 시간의 요소를 넣는 방안을 고려하거나, 혹은 연주자들을 시각적 작품으로 참여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마우리치오 카헬과 조지 크럼 등에서 그러한 예를 찾을 수 있다.

반면에 7월 12일 전주 한국전통문화전당에서 열린 김성희 작가의 ‘우주 그리고 리듬’ 전시회의 개막식 연주는 이러한 점을 어느 정도 극복했다. 연주자들의 시각적 참여도는 앞선 ‘그림책 음악회’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갤러리라는 공간에 전시된 다양한 작품들을 둘러볼 수 있는 시각적 동선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감흥을 일으킬 수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갤러리이기 때문에 ‘연주자’를 시각적 작품으로서 연출했다면, 보다 인터미디어적인 차원으로서 융합적 인지 환경을 구성할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畵音을 생각하다

이 두 연주회에서 화음쳄버오케스트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림을 놓고 음악을 연주하는 물리적 병치로부터의 융합적 지각은 예술적 경험 수준이 높은 관객만이 두뇌 속에서 생태적 수용이 가능하겠지만, 콘서트홀과 같은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공연의 경우 어느 정도 미리 화학적으로 소화된 작품을 차려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畵音’의 ‘’는 그림이고, ‘’은 음악이라는 문자적인 접근은 화음쳄버오케스트라 20여년의 역사를 비춰보면 정체에 가깝다. 게다가 이제는 화음쳄버오케스트라 이외에도 수많은 음악가들이 이러한 콘셉트의 공연을 하고 있으며, 또한 음악과 미술의 결합이라는 키워드로 나름 새로운 전략을 선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畵音’은 그림과 음악의 병치를 넘어, 시각과 청각이 화학적으로 결합되어 융합적으로 인지하는 환경을 만드는 인터미디어적인 개념을 포함한다. ‘畵音’이 가진 본래의 정체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