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를 통한 음악 읽기
유진선의 <화음 프로젝트 Op.158 ‘전람회의 그림’ 주제에 의한 변색> 공연 평론
1. 재현의 결
화음(畵音) 쳄버 오케스트라는 미술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창작곡을 지속적으로 위촉 · 초연해 왔다. 유진선의 <화음 프로젝트 Op.158 ‘전람회의 그림’ 주제에 의한 변색>(이하 <변색>) 또한 그 흐름 안에 놓여있다.
유진선의 <변색>은 좁은 의미로는 과거의 작품을 패러디하는 ‘인용음악’이다. 작곡가가 밝힌 인용의 원곡은 1874년 작곡된 무소르그스키(Modest Mussorgsky 1839-1881)의 <전람회의 그림>(Pictures at an Exhibition)이다. 하지만 유진선의 작업은 과거의 ‘악보’에서부터 무소르그스키가 작업한 ‘표제’ 그리고 그 표제의 토대가 된 ‘이미지’를 넘나든다.
무소르그스키는 화가 하르트만(Victor A. Hartmann, 1838-1873)의 유작 전시회에서 그림 열점을 골라 이를 묘사하는 피아노 모음곡을 작곡했다. 모음곡에는 관객이 걸어 다니는 동작을 나타내는 다섯 개의 <프롬나드>와 함께, <난쟁이>(The Gnomus), <옛 성>(The Old Castle), <튀일리의 정원>(Tuileries), <우마차>(Bydlo), <껍질 속의 병아리 춤>(Ballet of the Unhatched Chicks), <사무엘 골든베르그와 쉬밀레>(Two Jews: Rich and Poor), <리모쥐의 시장>(Limoge), <카타콤 - 죽음의 말로 죽은 자들에게 하는 대화>(Catacombae - Con Mortius in lingua mortua), <닭발 위의 오두막집: 바바야가>(The Hut on Hen’s legs: Baba-Yaga), <키예프의 대문>(The Great Gate of Kiev)이라는 그림이 묘사됐다.
무소르그스키가 음악으로 재현한 것은 화폭 속 ‘이미지’와 화폭 속 상이 지칭하는 ‘실제 대상’ 사이를 오간다. 예를 들어 <제4곡 우마차>에 등장하는 저음은 하르트만이 그렸던 ‘우마차 형상’을 나타내지만, 우마차의 사회 · 문화적인 상징을 다룬 것이기도 하다. 많은 학자가 이 작품을 두고 폴란드 농민의 힘겨운 삶이 담겼다고 해석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편, 무소르그스키가 우마차를 표현하기 위해 우마차를 ‘상징’하는 소리를 사용했는지, 우마차의 외형이나 그 ‘소음’을 그대로 흉내 냈는지, 아니면 우마차가 등장할 법한 ‘전조’(前兆)를 그려냄으로써 우마차라는 대상을 청자의 인식 안에 불러일으켰는지는 알 수 없다. 한발 더 나아가 화가 하르트만의 그림 그리기 작업에서 사용된 재현 방식에까지 논의를 확장하면 더욱 복잡한 지시(指示) 체계가 펼쳐진다.
결국 유진선이 바라본 ‘전람회의 그림’에는 무소르그스키의 원곡, 무소르그스키가 바라봤던 전람회의 실제 그림들과 그것으로부터 추출한 표제들, 그리고 화가 하르트만이 화폭에 표현했던 이미지와 그 이미지의 토대가 됐던 현실의 상과 상징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따라서 유진선이 작업한 5개의 프롬나드와 10개의 악장은 무소르그스키와 동일한 ‘표제’를 다룬다 할지라도 그 음향의 약호화(略號化) 방식과 음악의 진행방식, 그리고 음악적 뉘앙스가 새롭게 구성될 수밖에 없다. 유진선의 작업은 ‘이미 재현된’ 전람회의 그림을 ‘또다시 재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층위의 ‘그림’ 사이를 오가며 자신만의 관점을 드러낸다.
2. 유진선과 무소르그스키의 거리
무소르그스키는 하나의 선율이나 음형을 등장시킨 뒤 이것을 나열하고 반복한다. 아마도 이 음악을 난생처음 듣는 사람은 반복을 통해 이 소리에 서서히 익숙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140년 후의 청자는 무소르그스키의 음악이 너무도 익숙하다. 대부분의 청자는 짧은 청취만으로도 기억 속에 잠재해 있던 무소르그스키 음악 전부를 끄집어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유진선은 <변색>의 각 악장 초반에 무소르그스키의 모티브를 짧게 배치하고 이를 일종의 ‘트리거’(Trigger)로 이용한다. 청자는 유진선이 제시한 아주 짧은 단편을 듣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무소르그스키의 환영과 마주칠 수 있다.
10개의 서로 다른 표제로 이뤄진 곡. 유진선과 무소르그스키는 이 다채로운 악장 구성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풀어나간다. 먼저, 무소르그스키는 19세기 말 유럽인이 느꼈을 다양한 사회 · 문화적 환경을 나열한다. <제4곡 우마차>와 <제6곡 사무엘 골든베르그와 쉬밀레>에는 폴란드의 생활과 폴란드의 유대인이, <제3곡 튀일리의 정원>과 <제7곡 리모쥐의 시장>에는 프랑스의 생활이, <제1곡 난쟁이>와 <제9곡 닭발 위의 오두막집: 바바야가>에는 러시아의 옛 설화가 묘사된다. 또한, 다섯 개의 <프롬나드>에는 러시아의 정취가 묻어 있으며 각 악장의 제목은 러시아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등으로 다채롭게 구성됐다.
19세기 유럽인은 무소르그스키가 표현한 ‘폴란드적인 리듬’이나 ‘프랑스적인 상징’ 등을 청취한 후 그 의미를 즉각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에는 불가능하다. 무소르그스키가 약호화했던 섬세한 사회 · 문화적 기호들이 악장의 표제 아래 귀속되어 그저 ‘비-서유럽적인’ 특질로만 느껴질 뿐이다.
유진선의 작업에서도 악장 간의 다채로움이 드러난다. 유진선의 경우 이 다채로움은 현대음악에서 자주 발견되는 ‘양식적 다원주의’라는 키워드로 독해된다. 예를 들어 <제2곡 옛 성>의 리듬과 음향은 마치 ‘하와이 음악’처럼 들린다. 이 악장을 이루는 음악적 요소들은 무소르그스키가 ‘중세 - 이탈리아 - 음유시인’이라는 키워드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했던 것이지만, 원곡과 동일한 모티브와 리듬으로 된 유진선의 음악은 전혀 다른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한편, 유진선의 <네 번째 프롬나드>에서는 협화적 음향과 온음계적 음계 진행이 도드라진다. 이 악장은 미니멀리즘 음악 혹은 조성적인 흐름을 지지하는 동시대 음악과 닮았다.
후반부의 악장들에 이르면 종교적인 한글 부제들을 발견할 수 있다. 유진선은 <제6곡 사무엘 골든베르그와 쉬밀레>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 <제8곡 카타콤 - 죽음의 말로 죽은 자들에게 하는 대화>에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그리고 “지옥에서 고통 받는 혼들”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종교적인 소재는 무소르그스키의 작업에서도 등장한다. 하지만 유진선은 더욱 적극적이다. 그는 무소르그스키 악보에 있던 단어들을 토대로 새로운 한글 표제를 만들어냈고, 이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한다.
<제8곡 카타콤 - 죽음의 말로 죽은 자들에게 하는 대화, 부제: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 지옥에서 고통받는 혼들> 악장은 강렬한 인상을 준다.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부분에서 등장하는 느린 선율은 일종의 ‘목소리’처럼 들리며 이어지는 “지옥에서 고통 받는 혼들”에서는 선율이 일시적으로 사라지고 고음부로 모든 악기가 수렴해 진동한다. 곧 이 음향은 바람 소리와 함께 사라지며, 다시 선율이 등장하고, 이내 모든 소리가 사그라지는 것으로 끝이 난다. 길지 않은 악장이지만 짜임새의 교체가 잦으며 이를 통해 무척 극적인(dramatic) 구도를 연출한다는 점이 눈에 띈다.
종교적인 분위기를 강화함으로써 ‘과거의 마스터피스’에 자신만의 감각을 덧씌우는 것. 이런 방식은 무소르그스키 원곡과 유진선의 ‘차이’를 다시 한 번 고민하게 한다. 이 땅에서 ‘한국적인 것’이나 ‘음악적 모국어’와 같은 기치들은 이미 너무 낡은 것이 되었고, 많은 한국 태생 작곡가들이 전 세계 작곡가들과 동일한 음악 어법을 공유한다. 하지만 국내의 현대음악 작곡가들이 행하는 경계의 넘나듦이란 ‘우즈베키스탄 사람이 러시아어로 글을 쓰거나 체코에 사는 유대인이 독일어로 글을 쓰는 것’과 같은 인상을 줄 때가 많다. 마치 온전히 내 것이 아닌 것을 전유하는 소수자의 모습처럼 보인다 .
이런 상황에서 작곡가의 개성이 가미된 종교적 표현은, ‘서구 음악 - 러시아적 소리 - 이방인의 언어’라는 타자의 벽을 ‘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것을 조작하고 장악했다는 당당한 표식처럼 보인다. 국적이나 민족에 관련된 진정성이 모호해지고 있으며 이것이 너무도 낡게 느껴지는 상황에서, ‘종교적 가치관’이 작곡가의 근원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통로로 사용된 느낌이다. ‘인용음악’이라는 형식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를 ‘비틀기’라 표현할 수 있다면, 유진선 작품 중후반을 지배하는 종교적 분위기는 비틀기 그 이상의 감정을 자아낸다. 종교적 인상들은 ‘서구 - 러시아 - 이방인’과 양 극단에 배치됨으로써, 상대적으로 그 반대편 끝에 서 있는 유진선이라는 개성적인 주체를 소환한다.
3. 다양한 변색(變色) 읽어내기
유진선과 청자는 다양한 재현과 지시(指示)의 혼재 속에서 ‘전람회의 그림’을 경험한다. 그러나 청자와 유진선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유진선은 자신의 경험을 <변색>이라는 새로운 악보로 고정했지만, 청자는 여전히 수많은 ‘전람회의 그림’ 사이를 떠도는 중이다. 청자는 ‘전람회의 그림’이라는 기억 속 풀(Pool) 안에 유진선의 음악을 하나 더 추가했을 뿐이다.
유진선은 자신의 작업을 두고 ‘변색’이란 단어로 지칭했다. 적절한 변색이란 있을 수 없고, 완료된 변색이라는 개념도 모호하다. 변색은 처음의 것에서 뭔가 변화한 상태를 지칭하지만, 그 상태가 정확히 어느 지점에 이르러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청자의 기억 속 원작은 화가의 상상 · 화폭 속 이미지 · 무소르그스키의 음표 · 라벨의 오케스트레이션 사이를 떠돈다. 자연히 청자가 감지하는 변색의 정도와 방식, 변색이 끌어내는 의미도 시시각각 변한다. 청자는 유진선의 새로운 텍스트를 앞에 두고 이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체하고 기억 안에서 재조합한다.
이를테면 청자는 자신이 평소 즐겨 읽던 다양한 문학 작품의 몇몇 구절을 떠올리며 유진선의 작업을 탐독할 수 있다. 인용음악의 청취가 인용을 통해 이뤄지는 것. 이는 작품의 작곡 과정과 청취 과정이 같은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청자는 유진선 작업의 첫 부분을 들으며 최인호 작가의 『지구인』에 나오는 수은(水銀)의 변색을 떠올린다.
“....우리가 씹는 음식물을 침으로 녹이듯 수은은 금을 녹이는 유일한 타액이었다. 수은의 독은 전갈의 독보다 무서워 잘못 다루다가는 손톱을 까맣게 변색시키게 하고 마침내는 사람의 머리털을 갉아 내리는 마법의 물이었다....” (최인호, 『지구인』, 1980)
잠시 닿기만 해도 치명적으로 뚫고 들어가는 독소의 변색. 유진선의 <첫 번째 프롬나드>는 단선율에서 시작된 변색이 전체 음악의 진행을 중단시키고 그 음향의 내면으로 파고들어 간다. 이는 ‘패러디’라 불릴 수 있는 원곡에 대한 비틀기가 최초로 자행되는 순간으로, 마치 손톱에 묻은 수은이 그 내부로 스미는 끔찍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청자는 최초의 변색이 일어난 이후에야 이 음악에 등장하는 음표 하나하나를 민감하게 청취하기 시작한다. 최초의 주제가 이내 중단되고 한 음정에서 시작된 어두운 음향이 관악기에 의해 계속 침잠하고, 동시에 다른 악기들이 합세해 ‘구멍’이 계속해서 확장된다.
“....하루의 일이 끝나자 웅보는 잠시 허리를 펴고 서서 노을로 물든 서편 하늘을 바라보았다. 노을은 해가 떨어진 후에도 얼마큼 사라지지 않고 있다가 차차 보랏빛으로 변색해 갔다....” (한무숙, 『만남』, 1992)
한무숙의 글에서처럼 점진적인 변화를 통해 낯선 음향으로 이행하는 변색도 발견된다. 이때의 변색이란 ‘어느새’ 곁에 와 있는 것이다. <제4곡 우마차>에서 무소르그스키는 고된 노동을 하는 폴란드 농민의 모습을 시골 수레에 대한 묘사로 나타냈다. 유진선의 우마차도 처음에는 두 발로 걷는다. 그러나 이 짐승은 어느새 세 발로, 네 발로, 다섯 발로, 여섯 발로, 일곱, 여덟, 아홉, 열 발로 걷고 있으며 이 발걸음들은 한데 겹쳐져 특정한 방향으로 몰려 올라간다. 처음 대면한 짐승은 익숙한 형상이었지만 소리에 이끌려 가다 보면 어느 순간 현실에서 괴리된 언캐니(uncanny)한 공간에 도달한다. 기억 속 어딘가에 저장된 라벨 편곡의 타악기 트레몰로가 이 낯선 음향 위에 떠오른다. 유진선의 음악은 라벨 오케스트레이션의 일부를 꿈속에서 재생하거나 혹은 다른 생명체의 시점에서 극도로 느리게 재현하는 것 같다. 모든 악기가 진동하는 가운데, 청자는 먼 과거에 경험했던 라벨의 클라이맥스와 아주 잠시 조우한다.
“....여름햇살의 열기가 다 바랜 가을햇살은 미지근한 온기를 담고 있었다. 여름햇살이 화살처럼 내리꽂힌다면 가을햇살은 나비의 날갯짓처럼 내려앉는다. 노릇노릇 변색한 잔디 위에 가을햇살은 골고루 내려앉는다....” (조정래, 『태백산맥』 제1부 신의 모닥불, 1986)
조정래는 단어 ‘변색’을 색상의 그릇된 변형을 지칭하는 데 사용하지 않았다. 이때의 변색이란 긍정적이고 포근한 느낌이다. 유진선의 <다섯 번째 프롬나드>도 마찬가지다. 이 곡은 작품 안에 등장하는 모든 프롬나드 중 가장 ‘빛나는 형태’로 표상됐다. 프롬나드의 선율은 아주 대략적인 음의 윤곽만 남겨 놓은 채 모두 다 산화된 상태다. 음은 하나하나 울리며, 바람과 타악기 소리가 눈부신 광택을 가진 울림과 잔향을 만든다.
“....일어서면 머리를 숙여야 할 정도로 천장이 낮고 거기엔 육각형의 무늬 있는 도배지가 발라져 있는데 그것은 처음엔 푸른색이었던 모양이지만 지금은 빗물이 새어서 만들어진 얼룩 등으로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김승욱, 『역사』, 1964)
<제6곡 사무엘 골든베르그와 쉬밀레, 부제: 부자와 거지 나사로> 악장에서는 셋잇단음표 덩어리가 곡을 덮는다. 지속적인 빗방울이 뭔가를 변색시키듯, 유진선의 곡에서는 원곡의 트럼펫 장식음이 소환되어 곡을 변형시키는 얼룩이 된다. 무소르그스키 원곡에서는 뮤트한 트럼펫이 덜덜 떨며 기이한 선율을 연주했다면, 유진선의 곡에서는 이 ‘떨림의 제스처’에 해당하는 셋잇단음표만이 증식된다. 아마도 이 음향은 유진선이 ‘청취한’ 무소르그스키의 트럼펫 소리를 음악적으로 형상화한 것일 터다. 작곡가가 경험한 찰나의 인상이 섬세한 조작을 통해 새로운 음향으로 직조된다.
작품 후반부에 이르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지옥에서 고통받는 혼들”이라는 표제와 함께 종교적인 느낌이 청자를 감싼다. 종교학자 엘리아데(Mircea Eliade)의 말처럼 현대의 모든 청자는 망각된 종교를 가지고 있다. 청자의 자의식 안에는 신의 흔적을 재발견할 수 있을 정도의 지성이 있다. 이제 유진선은 종교적 의식을 집도하는 성직자가 된다. 청자는 “지옥에서 고통받는 혼들”을 들으며 아주 잠깐 세속적인 공간에서 벗어나 초월적인 곳으로 넘어간다.
많은 소리가 기억들 그리고 문장과 함께 조합된다. 청자는 다양한 음향의 호소에 이끌려 나온다. 객체로 불려 나온 청자는, 곧 주체의 자리에 서서 스스로 소리를 조합하고 읽어나간다. 그렇게 청자는 자신을 ‘청취 주체’로 재정립한다.
4. 차이를 통한 음악 읽기
전통적인 음악 해석은 음악 표면을 파헤쳐 그 안에 내재한 소리 구조를 탐구해왔다. 음악의 의미는 텍스트(music itself)에 있다 믿었고 특정 음형에 의미를 실어 작곡가의 의도를 표현한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음악 해석은 다원론적인 접근이 중요해지는 현시대에서는 점차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이제 쌍방으로 소통하는 음악들, 의미가 유동적으로 변하는 음악들 그리고 청자의 다양한 해석을 끌어내는 음악들이 도처에 산재한다.
작곡가 유진선의 2015년 작 <화음 프로젝트 Op.158 ‘전람회의 그림’ 주제에 의한 변색>은 동시대적인 음악 해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는 탁월한 예다. 이 작품은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층위의 재현들과 이 음악을 청취하는 다양한 방식을 고유의 관점으로 포착한다.
유진선의 작품을 받아들이는 청자의 태도도 흥미롭다. 그들은 ‘전람회의 그림’이라는 표지(標識)를 기준 삼아 수많은 ‘전람회의 그림’ 사이를 오가며 ‘차이’를 읽어낸다. 청자의 기억과 유진선의 작품은 끊임없이 경합하고, 청자는 이를 토대로 고유의 음악 읽기를 시도한다. 이들의 능동적인 해석은 음악의 의미가 항상 불안정하고 변하는 것이며, 수용자에 의해 일시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람회의 그림’이라는 ‘작은 점’을 중심으로 다양한 관점들이 소환된다. 모두를 한데 묶는 ‘전람회의 그림’이라는 표지는 이들을 구속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토록 다양한 시공간 그리고 이토록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존재한다.
차이를 통한 음악 읽기, 그리고 음악 하기는 다양한 사람이 공존하는 다원론적 사회의 이상적인 모습을 닮았다. 2015년 겨울,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던 유진선 작곡가의 현대음악 <화음 프로젝트 Op.158 ‘전람회의 그림’ 주제에 의한 변색>이 청자에게 즐거움을 줬던 이유, 그리고 이 음악이 동시대적이라 느꼈던 이유다.
(글 이민희 Minhee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