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메타심포니의 시간’
화음챔버오케스트라 레퍼토리 프로젝트 Heritage of Classics Ⅰ : Art of Symphony
김인겸 (음악평론가)
프롤로그 - 교향곡을 감상하는 방식
음반이나 유튜브 등의 매체를 거치지 않은 라이브 음악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연주회장을 직접 찾는다. 교향곡 같이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장르의 음악은 연주회장에서 감상하는 이득 또한 큰 편이다. 그런데 교향곡을 두 곡 이상 감상할 수 있는 연주회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우리나라의 주요 오케스트라가 등장하는 대표적 음악축제인 ‘2022 교향악축제’에서도 관현악곡, 협주곡, 교향곡 등을 섞어 프로그램을 꾸미고 있다. 같은 작곡가의 작품을 연주하는 전곡 연주회류를 제외하면 복수의 교향곡을 한 음악회에서 만날 기회는 흔치 않은 것이다.
다른 장르의 작품 없이 교향곡만 세 곡을, 그것도 시대와 지역을 달리하는 작곡가의 작품을 하루저녁에 감상할 수 있는 음악회는 놓칠 수 없었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 레퍼토리 프로젝트’의 첫 음악회는 이것만으로도 의미가 크다고 생각했다. 전반부의 하이든과 후반부의 나운영, 쇤베르크 사이의 인터미션은 15분이지만, 한 세기의 간극이 존재한다. 교향곡의 시대라 할 수 있는 19세기의 작품이 없다는 애초의 아쉬움은 연주가 진행되면서, 그리고 연주회의 여운을 되새기며 이 원고를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 이르러서는 상상과 성찰의 기쁨으로 변모하였다.
하이든: 교향곡 44번 '애도'
교향곡의 미학
교향곡 없는 클래식음악은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서양음악사에서 교향곡이라는 장르는 오랫동안 특별한 지위를 점해왔다. 작곡가라면 응당 교향곡에서 승부를 보아야 한다는 인식이 상식처럼 받아들여졌고, 지휘자의 시대였던 20세기에는 교향곡 연주로 명성을 획득한 거장들이 별처럼 빛났다. ‘교향곡의 예술’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번 연주회의 첫 곡으로 연주할 작품을 선정하는 작업은 이러한 교향곡의 위상을 생각할 때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교향곡의 미학을 압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선택지로 하이든은 최상이었다.
기악음악이 성악음악에 종속되어 있던 시대에 신포니아(sinfonia)라는 이름으로 오페라나 극의 서곡, 막간곡 기능을 한,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부속음악 같은 것이 교향곡의 원형이다. 신포니아는 19세기 초중반에 삼마르티니, 만하임악파의 대표격인 요한 슈타미츠 등을 거치며 콘서트용 다악장구조의 독립적 오케스트라 기악작품 장르인 교향곡으로 정립되어갔다. 하이든이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리는 것은 그가 교향곡이라는 장르를 창조해서가 아니라 교향곡 장르를 안착시키고 그 잠재력을 작곡가와 음악청중에게 증명하여 동시대의 모차르트와 후배인 베토벤에 이르러 교향곡이 거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예비한 ‘세례 요한’ 같은 역할을 해서가 아닐까. 하이든의 <교향곡 제44번>은 음악사적 의미와 함께 교향곡의 미학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하이든의 교향곡 작곡은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이전 시대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초기와 대중적 요구를 비교적 충실하게 반영한 후기에 비해 <교향곡 제44번>을 작곡한 중기에는 4악장 고전 교향곡의 형식에 ‘질풍노도’ 사조를 수용하면서도 하이든 자신의 실험적인 시도를 주저하지 않았다.
제1바이올린 7명, 제2바이올린 6명, 비올라 5명, 첼로 4명에 콘트라베이스 3명으로 현 파트의 균형과 안정감을 확보하고, 호른과 오보에를 두 명씩 배치한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연륜 있는 실내오케스트라답게 기민한 템포 변화와 다이내믹 대조를 잘 표현하며 하이든 교향곡의 아름다움을 연주하였다. 특히 3악장을 제외하고 단조조성이 지배적인 <교향곡 제44번> 특유의 분위기가 연주를 통해 잘 조성되었는데, 고전시대에 흔치 않은 조성구조를 가진 작품에 대한 훌륭한 해석으로 손색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음악감독 박상연은 간명한 동작으로 자신의 해석을 오케스트라에 구현하였다.
나운영: 실내교향곡 '낭만적'
폴리포니와 호모포니 그 이상, 심포니
현악4중주와 교향곡은 음악양식으로서 각기 다른 장르로 발전했지만, 편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같은 바이올린 두 파트와 비올라, 첼로 한 파트씩이라는 중추를 공유한다. 현악4중주와는 달리 현악섹션에서 하나의 파트(성부)를 여러 명의 연주자가 동시에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는 양적 증대가 질적 전화(轉化)로 이어짐을 잘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이는 단순히 볼륨이 커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음색과 음향, 다이내믹 등에서 다양한 표현을 가능하게 하여 작곡가의 잠재력을 증폭시켜 나타낼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한다(물론 현악4중주에서 다양한 표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나운영의 <현악4중주 제1번 ‘낭만적’>을 실내교향곡으로 무대에 올린 송주호의 기획은 참신함을 넘어 한국 교향곡 편곡・연주사에도 한 획을 그은 의미 있는 시도로 평하고 싶다. 편곡을 맡은 작곡가 정성엽은 관악기가 없는 현악오케스트라의 표현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한 파트 내에서 섹션을 더 잘게 쪼개는 디비전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에게 피치카토(활털이 아닌 손가락으로 현을 뜯어 연주하는 기법)와 콜레뇨 주법(활털이 아닌 활대로 현을 때려 연주하는 기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게 하는 등 나운영의 현악4중주 원곡을 실내교향곡으로 재창조하였다.
필자는 클래식초보자에게 강의 등을 할 때 음악의 텍스처로서 폴리포니(polyphony)와 호모포니(homophony)의 개념만큼은 알아두는 게 좋다고 강조하는 편이다. 폴리포니가 일종의 돌림노래처럼 각 성부가 수평적으로 독립적인 선율을 연주하며 동시에 수직적인 화성이 만들어지는 텍스처라면, 호모포니는 간단히 말해 주선율과 반주로 구성되는 텍스처이다. 나운영의 <실내교향곡 '낭만적'>에는 폴리포니와 호모포니가 뒤섞이며 그 사이에 한국전통음악의 어법이 자주 등장한다. 작품에는 이질적 음악적 재료가 조화롭게 어울리는 대목들이 연속하여 나타나는데, ‘함께[sym-] 울린다[-phony]’는 ‘교향곡’의 취지에 부합하는 듯해 감동의 폭이 더욱 커졌다. 송주호가 프로그램노트에서 소개한 “선토착화 후현대화”라는 나운영의 작곡 모토가 한국 작곡가에게 시사점을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쇤베르크: 실내교향곡 2번
심포니와 메타심포니
음악회도 다양한 기준과 관점으로 분류하여 감상이나 평가의 양상을 달리할 수 있다. 챔버오케스트라라고 해서 모차르트나 초기 베토벤의 교향곡을 연주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25명의 현악기 연주자로 고전 후기나 낭만 초기의 교향곡이 요구하는 사운드를 만드는 데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또한 관악기가 2관 편성을 넘어가면 현 파트와 관 파트의 균형에 문제가 생길 수 있고 예산의 제약이라는 현실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런 상황 등으로 여러 제약조건을 극복하고 좋은 음악회 레퍼토리를 만드는 일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이든과 나운영, 쇤베르크의 작품으로 ‘교향곡의 예술’이라는 프로그램을 설계한 이유 중에는 현실적 한계도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를 건너뛴 교향곡 프로그램은 프롤로그에서 언급한 상상과 성찰의 기쁨을 필자에게 선사했다.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베를리오즈, 브람스, 드보르작, 브루크너, 말러 등을 건너뛴 덕분에(!) 오랜만에 교향곡의 역사를 공부했고 19세기 교향곡의 시대를 어떻게 극복할지 모색한 쇤베르크의 고뇌를 상상할 수 있었다. 또 우리나라의 중요한 작곡가 나운영을 재조명하였다. 더 나아가 그동안의 교향곡 감상이 지나치게 사운드 중심으로 치우치지 않았나 하는 성찰까지 하게 된 것이다. 요컨대 심포니를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메타심포니(metasymphony)’의 세계까지 덤으로 경험하였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가 연주한 쇤베르크의 <실내교향곡 2번>을 감상하며 많은 악기가 만들어내는 커다란 볼륨뿐만 아니라 다채로운 사운드가 빚어내는 아기자기한 앙상블이 교향곡의 또 다른 매력일 수 있음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2악장에서 작은 음량으로 다양한 음색을 만들어내는 관악기 연주는 실내교향곡의 백미였다.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실내교향곡 2번>에서 필자가 느낀 하이든으로의 회귀는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하이든과 나운영, 쇤베르크의 작품은 우선 제각각 개별적인 심포니로 들린다. 그리고 세 작품을 한데 모아 감상하고 그 감상행위로부터 빠져나와 한 걸음 물러서서 보니 세 작곡가가 담아내려 했던 시대정신이 읽히는 메타심포니로 재탄생한다.
에필로그 – 음 예술과 음 예술 너머
바로 위에서 언급하기는 했지만,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교향곡의 예술’을 감상한 후 그동안 필자의 교향곡 듣기는 ‘후기 낭만주의적 거대주의’에 경도되어 있지는 않았는지 다시 되돌아본다. 피치카토로만 연주하는 브리튼의 <심플 심포니>를 앙코르 곡으로 감상하며 엄숙함과 무게감이 교향곡의 전부는 아니라고 다시 생각했다. 다른 음악처럼 교향곡도 음 예술의 한 장르라는 단순한 명제로부터 출발해야 한층 더 다양한 작품을 편견 없이 듣고 작품에 내재한 여러 의미를 포착할 수 있으리라는 성찰을 한다.
클래식음악을 향유한다는 것은 음 예술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일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 있으나, 음 예술 너머 혹은 이면의 그 무엇으로 건너가거나 파고드는 행위가 파생되어도 즐겁다. 7월부터 이어질 화음챔버오케스트라 레퍼토리 프로젝트 ‘클래식의 유산(Heritage of Classics)Ⅱ, Ⅲ’의 주제는 차례대로 ‘형식의 다양성’과 ‘현의 환상’이다. 음악과 연주 그 자체뿐만 아니라 어떤 새로운 담론이나 인식이 메타음악으로 생성될지 기대된다. [畵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