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화음프로젝트 아카데미 / 화음챔버오케스트라 현대음악 렉처콘서트 시리즈 Ⅶ
노력과 방황으로 미래를 여는 여정
‘미래를 여는 12개의 음: 음렬주의’
2021년 11월 27일(토) 오후8시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
2020년 초, 전체 7회로 예정된 화음챔버의 렉처콘서트 시리즈의 첫 연주회는 감염병이 전세계를 잠식할 때 시작했다. 감염병의 여파는 시리즈의 마지막까지 잦아들지 않았다. 2020년 12월 13일에 예정됐던 세 번째 연주회 때는 크게 휘청했다. 연주회 3일 전에 방역당국의 지침에 따라 연주회가 취소됐다. 연주는 결국 영상으로만 제작됐다. 그 후 몇 번의 위기 속에서도 렉처콘서트는 무대에서 진행됐다.
화음챔버의 현대음악 렉처콘서트에서는 미니멀리즘, 표현주의, 우연음악, 신고전주의 등 다양한 주제의 음악들의 역사적 의미를 밝히고 현재적 시점에서 재해석했다. 짧지 않은 여정의 마지막 연주는 한국의 젊은 작곡가 장지현의 공모당선작이었다. ‘밤과 낮’은 화음프로젝트 Op.218로, 화음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탄생된 218번째 성과물이다. 신예 작곡가의 작품을 세계초연하면서 시리즈의 막을 내린 것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이는 이날 첫 곡인 리스트의 <파우스트 교향곡> 1악장 ‘파우스트’ 중 서주의 연주와 같이, 새로운 막을 여는 것 같은 여운을 주었다.
‘파우스트’ 서주는 이후에 무엇인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사라졌다. 사실 서주의 역할은 원래 그런 것이다. 이후에 진짜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증폭시키면서 끝내는 것. 끝을 확실히 맺으며 명쾌한 종지감을 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장지현의 ‘밤과 낮’ 역시 밤과 낮, 무의식과 의식, 꿈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다 서서히 사라졌다. 장지현은 이 작품을 헤르만 헤세의 소설 ‘크눌프’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했다고 밝혔다. ‘파우스트’와 ‘크눌프’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방황과 방랑의 여정이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라 하던가.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에 나오는 말이다. 이 문장은 집과 같은 으뜸음으로 시작해서 여정을 끝내고 다시 으뜸음으로 돌아오는 조성음악의 틀을 벗어난 음렬음악의 도전과 모험과 맞닿아 있다. 음계를 이루는 12개의 음으로 새로운 틀을 만드는 음렬주의의 실험이 이날 연주된 6개의 작품에 다양하게 담겨있었다. 리스트의 ‘파우스트’, 쇤베르크의 ‘모음곡, 작품번호 29’ 중 3·4악장, 하우어의 ‘12음 유희’, 메시앙이 ‘음가와 강세의 모드’, 스트라빈스키의 ‘7중주’, 장지현의 ‘밤과 낮’ 모두 비교적 길이가 짧고 전달력이 높았으며, 연주된 순서 또한 난이도의 완급 조절이 뛰어났다.
하나라도 더
무엇보다도 이날 해설을 맡은 송주호의 진행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는 간결하고도 쉽고 친절하게 작곡가와 작품에 대해서 설명했다.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는 음렬음악을 연주하고 듣는 의미를 밝혀주며 흥미를 자극했다. 쇤베르크의 12음렬 작품의 감상에 앞서 “각자의 추상화를 그려보라.”라고 제안했으며, 은둔한 작곡가 하우어의 작품을 감상하기 전에는 아마 “평생 한 번 들을 수 있는 연주”라고 말하며 관객의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메시앙의 작품도 실제 연주로 들을 기회가 드물다는 것을 언급했고, 스트라빈스키의 작품 역시 음반도 쉽게 구하기 힘든 상황을 말했다. 이렇게 해설가 송주호는 작품 감상에 앞서 작품에 대한 설명뿐 아니라 작품 감상의 의미와 감상자들의 적극적 참여를 강조했는데, 이는 연주 감상의 경험을 더욱 드물고 특별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번 화음의 현대음악 렉처콘서트 시리즈에는 두 명의 해설가가 함께했다. 해설가 송주호와 허효정은 전체 7회 연주회 중에서 각각 5번과 2번의 진행을 맡았다. 스타일은 다르지만 강연 경험이 풍부한 이 두 사람은 렉처콘서트에 기여한 바가 크다. 매회 연주회 때마다 연주곡을 충실하게 설명한 프로그램북이 있었지만, 많은 이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음악을 선보일 때 말의 전달력이 글보다 직접적이다. 해설가의 말에 따라 객석의 분위기가 즉각적으로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음악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우러나는 해박한 지식을 갖춘 해설가 송주호의 설명은 여유롭고 유머가 있었다. 첫 연주회(2020년 5월 24일, 미니멀리즘)부터 마지막 연주회(7회, 2021년 11월 27일, 음렬주의)까지 그는 고르게 수준 높은 렉처를 선보였다.
허효정은 두 번(4회, 2020년 12월 28일, 신고전주의와 6회, 2021년 10월 20일 종교적 음악)의 해설을 맡았는데, 두 성격이 확연하게 달랐다. 처음과는 달리 두 번째에서는 해설의 비중을 크게 늘려 해설가의 역할을 확장했다. 연주자이자 음악학자이기도 한 허효정은 깊이 있는 통찰력으로 종교적 음악의 역사와 의미를 밝힐 뿐 아니라, 추상적 주제를 삶의 구체적 경험과 연관시켜 풀어냈다. 마치 하나의 강의 같은 심도 있는 해설이었다.
렉처를 진행한 두 해설가의 개성과 특성이 달랐지만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청중에게 더 가깝게 다가갈까 하는 고민과, 여러 방향에서의 접근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이러한 렉처가 빛을 발한 것은 화음챔버의 탄탄한 연주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지막 연주에서 해설가 송주호는 “듣도 보도 못했던 음악을 연주하느라고 고생한 연주자들”이라고 표현하며 박수를 청했다. 2년간 7번의 연주회를 준비하며 감염병의 위협과 연주에 대한 압박을 견뎌낸 화음챔버의 노고는 큰 박수를 받을 만하다. 화음챔버의 구성원들은 이미 개개인이 탁월한 실력을 인정받은 프로 연주자들로서 새로운 시리즈를 완수했다고 해도 특별히 눈에 띄는 연주력의 변화를 감지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만약 이들이 매회 연주 때마다 실력의 차이를 보였다면 그것이야말로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음챔버가 조금 더 생기가 있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인가. 연주자들에게 연주는 일상이고 일이지만 실제 연주회에서 수적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청중은 매번 특별한 경험을 기대하고 객석에 앉는다. 연주자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음악에 대한 애정과 그에 따른 헌신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번 시리즈가 진행되는 동안 몇 번의 빛나고 가슴 벅찬 순간들을 만든 주역 역시 화음챔버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시리즈를 완수하는 동안 내실 있는 성장이 이루어진 것은 분명하다. 이들의 모든 노력은 그 근원으로 들어가면 한 사람이라도 더 함께 음악의 미래를 열어가고자 청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그 열망과 열의가 더욱 생명력 있는 연주로 표출되었을 때, “듣도 보도 못했던 연주”를 듣기 위해 객석을 찾아온 청중의 다음 발걸음을 이끌 것이다.
이 여정의 의미
현대음악 렉처콘서트 시리즈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한다. 이번 시리즈를 통해 7명의 한국의 젊은 작곡가들의 작품이 창작되고 세계초연된 것은 뜻 깊은 성과다. 이제 막 학부를 졸업한 작곡가부터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작곡가까지 화음의 현대음악 시리즈를 통해 새로운 창작의 기회를 얻었다. 사실 현대음악 렉쳐콘서트 시리즈에서 연주된 음악들이 모두 현대에 창작된 음악은 아니다. 특정 사조와 연관이 있는 과거의 음악들도 많이 연주됐다. 현대에 나타난 어떤 음악사조도 역사의 흐름 안에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에 창작된 모든 음악도, 탄생 당시에는 현대음악이었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작곡가들이 새로운 작품을 계속해서 창작해야 진정한 현대음악, 오늘의 음악이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시리즈가 진행됨에 따라 무대와 객석간의 거리감이 확실히 줄어들었다. 성공적으로 포문을 연 첫 연주회 이후에 해설과 연주와 객석의 분위기가 겉돌거나 때로는 시리즈를 진행하는 것 자체에 급급한 느낌을 준 시간도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안정적이지 않은 사회 상황과 지원에 따른 여러 변수들, 거기에서 비롯된 다양한 영향이 연주회에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기복에도 불구하고 화음챔버는 이 시리즈를 버텨냈다. 7번의 연주회 동안 이들의 무게 중심이 이리저리 쏠려왔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화음챔버가 연주회에 대한 고민과 실험을 행해왔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 현대음악 시리즈를 통해 화음챔버는 두 가지를 점검해봐야 할 것이다. 이들이 있는 현재의 좌표를 확인하고, 이들이 열어가야 하는 미래에 대한 방향성을 다시금 잡는 일이다.
서막의 끝에서
종합하면, 이 시리즈는 세 가지 면에서 의미와 성과가 있다고 본다. 첫째, 실연으로 듣기 어려운 작품들을 직접 연주하고 들을 기회를 제공했다. 이는 연주자와 청중 모두의 음악 경험의 지평을 넓혔다.둘째, 렉처를 진행한 해설가들의 선전이다. 이들은 현대음악과 청중 앞에 놓인 두꺼운 장벽을 최전선에서 허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렉처와 콘서트가 결합된 연주회의 새로운 수준을 열어 보였다. 셋째, 우리의 젊은 작곡가들에게 무대를 제공해 큰 힘을 실어주었다. 이들은 오늘의 음악을 창조해 미래를 열어가는 주역들이다.
현대음악 렉처콘서트 시리즈는 7번째 무대로 막을 내렸지만 실제적으로 이 시리즈 자체가 거대한 서막 역할을 했다고 본다. 서막에서 끝나는 극은 없다. 서막에는 본격적 이야기를 위한 수많은 주제와 동기들이 담겨있다. 지금까지 화음챔버가 노력과 방황으로 이룬 성과들이 본막을 열어가는 힘이 되기를 바란다. 극에서 주인공의 노력과 방황은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추동력이다. 노력하는 한 방황하겠지만, 노력을 멈출 수는 없다.
서주원(bwv1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