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위치에서 그 너머를 바라보다
2021 화음프로젝트 아카데미 / 화음챔버오케스트라 현대음악 렉처콘서트 시리즈 VI
‘내면에서 영원으로: 종교적 음악’
2021년 10월 20일(수) 오후 7:30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글: 송주호
종교 음악과 진정성
‘바로크’라는 명칭은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의 포르투갈어 ‘barocco’에서 유래했다는 의견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빛나는 예술을 ‘일그러졌다’고 본 이유는 무엇일까? 16세기 중반에 나타나기 시작한 화려하고 복잡한 미술품들은 서사적인 메시지를 넘어 인간의 직관적인 감각을 자극했고, 이러한 특징은 이전 예술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중세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종교적인 목적을 가진 작품들이나,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고대 그리스의 고전과 스콜라 철학이 중심에 있는 작품들로부터 받는 감흥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바로크의 예술은 차츰 주관적인 형태를 띠면서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로부터 내려오는 비례에서 벗어났는데, 과거의 입장에서는 일그러진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움직임은 미의식의 파괴처럼 보였겠지만, 인간 중심의 예술은 인문주의의 지지를 얻어 모든 분야에 빠르게 파고들었고, 인간의 주관적인 느낌이 예술의 이유이자 내용이 되었다. 즉, 감상자는 작품의 수용자에서 공감을 통한 소통 상대로 격상되었으며,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되었던 것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찾는 인류의 새로운 탐색과 시도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흐름에서, 이미 르네상스 시대에 힘이 빠지기 시작한 종교 음악은 바로크에 들어서 감성적으로 변화되었고, 고전을 지나면서 음악의 한 장르가 되었다. 그리고 낭만 후기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실용 음악으로 취급되었고, 20세기에는 사용할 수 있는 텍스트 중 하나 정도로 사용되었다. 그래도 메시앙이나 펜데레츠키 등 신앙심이 강한 작곡가들은 자신의 믿음을 음악의 주요 주제로 삼았고, 본래 종교적 전통이 강한 지역에서는 이러한 주요 클래식 음악의 역사적 흐름과 별도로 꾸준히 신앙심을 보여주었다. 합창 전통이 강한 영국이 그 예로, 존 태브너, 존 러터 등이 종교 합창곡으로 큰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러시아와 인접한 동유럽 국가들도 특유의 정교회 분위기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고 보면, 오히려 자유 의지에 의해 신앙을 표현하는 오늘날의 종교 음악에는 그 어떤 때보다도 진심 어린 진정성이 담겨 있다. 이뿐 아니라 신앙과 종교를 넘어, 삶의 유한성을 바탕으로 죽음을 삶의 연장 혹은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받아들이며, 이를 음악으로 풀어내는 종교적 음악을 내놓기도 한다.
전반부: 하나의 완벽한 판타지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여섯 번째 현대음악 렉처 콘서트 시리즈는 피아니스트이자 음악학자인 허효정의 해설과 함께, 이렇게 우리 시대에 고유하게 나타난 종교 음악과 종교적 음악을 살펴보았다. 특히 클래식 음악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치는 가장 오래된 음악 문헌인 그레고리오 성가와 함께, 자국의 교회 음악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태브너와 아르보 패르트의 작품을 선정하여, 인류가 천 년 동안 이어온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또한 윤이상과 공모당선자인 이장희의 작품을 통해, 우리 동양인들이 가진 삶에 대한 시각을 다시 생각해보게 했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이러한 프로그램은 종교 음악을 구시대의 유물이나 과거에 대한 동경이 아닌, 과거와 이어진 분명한 우리 시대의 음악으로 보게 했다. 그리고 과거를 되새기고 현재와 소통하며 미래를 추구하는 음악으로서, 육신을 가지고 영원을 꿈꾸는 인간에게 시공간을 초월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첫 곡에서부터 확연하게 드러났다. 가톨릭 수도사의 옷을 입은 신부님이 부르는 그레고리오 성가는 과거의 재현이자 종교적 분위기의 발현이면서도, 음악회 홀이라는 공간과 그 음향으로 고전 음악으로서 수용되도록 함으로써, 서로 다른 이미지가 겹쳐있는 이중적 판타지로 나타났다. 처음에는 어색하기도 했지만, 곧 종교적 선입견을 벗어나 음악의 원류로서 그레고리오 성가를 인식하는 결과로 이끌었다. 이러한 점으로 다음 곡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존 태브너의 <어린 양>은 자신의 성가 합창을 그대로 현악 앙상블을 위해 옮겨놓은 것으로, 신비로운 화음과 차분한 템포로 그 뒤를 이었다. 특히 이 작품은 합창에서 기대하는 경건한 분위기가 아닌, 현악기의 감상적인 분위기로 변모되어 또다른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이 감흥은 성가를 감성적으로 수용하는 우리 시대의 종교적 이미지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패르트의 <타불라 라사>는 정교회의 엄숙한 이미지와 인간의 무상한 삶에 대한 감상이 겹쳐있다. 본래 ‘타불라 라사’는 태어날 때와 같은 백지상태를 말하지만, 이 작품은 오히려 세상을 떠날 때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어가는 것으로 보였다.
이로써 전반부 프로그램은 곧 신을 노래하며 육신을 벗어 영원한 세계로 가는 과정으로 인지되었고, 낯설고 쉽지 않은 작품이었음에도 함께 자리한 감상자들은 큰 공감을 표했다. 이는 세 작품이 교회 음악의 전통으로 연결됨으로써 하나의 완벽한 판타지를 구현하였으며, 또한 흔치 않은 프로그램이라는 생소함과 종교 혹은 종교적 음악에 대한 익숙함이 균형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후반부: 삶 너머의 다양한 이미지
후반부는 전반부와 다른 전개를 보였다. 우선 산드스트룀의 <클라리넷을 위한 키리에>는 전반부 첫 곡인 그레고리오 성가와 대응되며 또 다른 시작을 암시했다. ‘키리에 엘레이손’으로 시작하는 라틴어 기도문은 시간이 흐를수록 감성적으로 변화되었는데, 가사가 사라진 이 곡은 감상만을 남겨두었다. 그래서 신의 영원성을 지향하는 의도에 감성적인 내면성을 더했다. 하지만 앞서 그레고리오 성가를 음악회장에서 연주했던 경우와는 달리, 음악회장에서 연주되는 이 곡은 기악 독주곡으로 수용됨으로써 숭고한 감흥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본래 성당에서 연주하기 위한 곡이라는 점에서, 장소 자체가 작품의 의도라고 생각된다.
이어지는 공모당선작 이장희의 <천장>(天葬: Bya Gtor)과 윤이상의 <협주적 단편>은 동양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이 연주회의 의미를 보다 뜻깊게 했다. 이장희의 작품은 티벳에서 이루어지는 장례 풍습을 음악으로 묘사한 것으로, 다양한 악기를 고루 사용하면서, 각 악기들이 갖는 일반적 인상을 활용하여 매우 이해도가 높았다. 하지만 예술 작품으로서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서사뿐만 아니라 작가가 천장을 통해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구체적인 메시지일 수도 있고, 작곡가가 느낀 감성의 표현일 수도 있다. 드뷔시가 교향시 <바다>에서 파도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음악적 요소를 통해 감성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윤이상은 언제나 자신의 음악에 도교적인 요소를 생각했으며, 의도적으로 그러한 모습을 띄도록 했다. 그가 사용한 방법은 음과 양의 이원론적 요소의 대립으로, <협주적 단편> 역시 소규모 앙상블과 전체 앙상블의 음악적 대립을 통해 이를 만들어갔다. 하지만 이러한 대립은 이미 서양 작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요소이기에, 사실상 서양 고전 음악 작법의 동양적 해석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도교적인 이미지를 학문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도, 감성적으로 공감하기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점이 현대음악이 많은 감상자를 확보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은 아니며, 이성적인 장치를 통해 새로운 감흥을 만들어내고자 했던 시대적 산물이다.
이렇게 감상적인 인상과 장례의 묘사, 그리고 음악적 효과로 구성된 후반부는, 분명 새롭고 다양한 작품들을 접할 수 있는 범상치 않은 기회였다. 하지만 전반부와 같이 하나로 연결되어 음악적 시나리오로서 각인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으며, 본 음악회의 주제인 내면성과 영원성이라는 종교적 인상과는 방향성이 다소 달랐다. 한 음악회에서 다양한 인상과 감흥을 전달하는 것이 절대 문제는 아니지만, 본 주제가 감상자에게 주는 기대감과는 다르게 진행되었다는 점은 감상자들을 다소 혼란스럽게 했다.
재주술화 시대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외친 것은 인류 사회가 신비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가치보다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증거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막스 베버가 근대사회의 특징을 ‘탈주술화’라고 말한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오히려 ‘재주술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것은 생산 중심 사회가 아닌 소비 중심 사회임을 의미하며, 또한 현실이 아닌 이상을 지향한다는 것은 의미한다. 요즘 사람들이 과학보다는 인문학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와 관련되어있으며, 나아가 종교적 사고를 터부시하지 않는다. 이러한 때에 종교적 음악을 다룬 것은 시대적으로 매우 적절하며, 예술을 통해 우리 시대를 돌아보는 의미심장한 시간이었다. 더군다나 타 장르에 비해 유난히 유희적 기능이 강하게 요구되는 음악에서 이러한 시간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성과이다. 앞으로도 우리의 삶의 모습과 함께 삶 너머의 모습을 다룸으로써, 현대 인류의 영혼과 소통하는 예술적 프로그램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