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화음프로젝트 아카데미: 탐구-현대음악 렉처 콘서트 시리즈 IV]
새로운 고전을 만드는 정신
왜 연주회를 해야 하는가? 왜 연주회를 가야 하는가? 이 거창하고도 한편으로는 소박한 질문 앞에서 어떤 연주회는 답을 주고 어떤 연주회는 질문을 던진다. 묵은 체증까지도 해소시키는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연주회가 있는가 하면, 연주회 후 한동안 머리가 무거울 만큼 묵직한 질문을 남기는 연주회가 있다. 화음챔버의 ‘온고지신: 신고전주의’ 렉처 콘서트는 후자에 속하는 연주회였다.
불확실성속에서 이어지는 연주회
2020년에 연주자들은 연주 자체에 대한 부담감 외에 다른 종류의 불확실성을 감당해야만 했다. 감염병의 대유행으로 직격탄을 맞은 곳 중 하나가 연주계이다. 연주를 준비하는 연주자들과 연주를 기다리는 청중 모두 연주회가 열릴지 취소될지 모르는 상황을 겪어야 했다. 연주회를 앞두고 취소 공지를 보는 것은 어느덧 흔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2020년 12월 28일에 열린 화음챔버의 연주회는 특별히 더 불확실한 상황에 처했다. 연주회 전주부터 3단계 격상 여부가 논의되더니, 27일 오후에야 2.5단계 지속이 결정된 것이다. 즉 연주자나 청중 모두 바로 전날 저녁까지도 그 다음날 연주회가 진행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 상황에서 연주자들이 겪어야 하는 부대낌은 상당했으리라.
이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지금으로서는 기약이 없다. 감염병이 진정된다 하더라도 세계는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이미 새로운 세상은 시작됐다. 과도기 역시 엄연히 시대를 이루는 하나의 중요한 시기다. 예술의 역사에서 많은 예술가들이 이 과도기를 능동적으로 맞이했다. 현실에 대한 부정과 과거에 대한 향수에 빠지기 보다는 과거와 현재의 가장 좋은 것들을 살려냄으로써 새로운 미래를 주체적으로 열어갔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옛 음악과 새 음악의 대결은 음악사를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새 것은 옛 것이 되고, 그에 대응해 또 다른 새 것이 나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필연적이다.
과거의 전통을 현재의 그릇에 담아 새로움을 창조하는 정신은 신고전주의에도 잘 드러난다. 음악사에서 고전주의가 들어가는 시기는 두 시기가 있다. 첫 번째는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으로 대표되는 빈고전파이다. 두 번째는 1910년대 이후 스트라빈스키, 힌데미트, 프로코피예프 등의 작곡가들이 바로크 시대의 대위법과 고전시대의 분명한 형식 등을 자신들의 작품에 접목시키면서 나타난 신고전주의다. 특별히 신고전주의는 낭만주의에 대한 반감에서 탄생했다. 후기 낭만으로 갈수록 표현의 강도와 규모가 극대화되면서 한편에서는 이에 대한 반발감이 커져갔다. 게다가 1914년 1차 세계 대전 이후에 예술에 드리워졌던 낭만의 커튼이 무참하게 찢기면서 음악에서도 동경과 환상, 고양된 감정을 추구하기보다는 균형, 객관성에 가치를 두었다. 한없이 늘어나던 작품의 길이와 대규모 악기 편성은 짧아지고 작은 편성을 선호하게 됐다. 이러한 변화에는 전후의 상황이라는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즉 20세기에 탄생한 신고전주의는 음악 내적 외적인 요인이 결합하면서 탄생한 일종의 위기극복의 대안이었던 것이다.
온고지신, 신고전주의
이날 연주회에서는 해설가 허효정이 첫 곡 브리튼의 작품부터 마지막 스트라빈스키의 작품까지 음악에서 옛 것과 새 것의 연결고리를 찾아 감상의 맥을 친절히 짚어주었다. 첫 곡 벤자민 브리튼의 ‘단순교향곡 Op.4’는 제목에서부터 분명하게 표방하고 있듯 간결하고도 명확한 표현을 지향한다. 4악장 구성으로, 1·3악장은 바로크 춤곡 스타일, 2악장은 유쾌한 피치카토, 마지막 4악장은 모방적인 대위법이 등장한다. 여기에서 바로크 춤곡과 대위법은 귀족적이며 현학적이 아니라 친밀하고 호소력 있게 쓰였다. 각 악장의 제목(활기찬 부레, 장난기 많은 피치카토, 감성적인 사라반드, 즐겁게 뛰노는 피날레) 역시 친근하고 소박하다. 작품은 활력과 정감 넘치며 귀에 쉽게 다가오지만 연주가 그리 단순해보이지는 않았다. 빠른 속도 가운데 선율의 명료함과 투명한 음향을 유지해야 했는데, 화음챔버는 특유의 노련한 연주력으로 작품의 매력을 십분 살리면서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만드는 유쾌감을 선사했다.
모차르트의 ‘아다지오와 푸가 K.546’은 바로크 시대에 널리 쓰인 스타일과 형식을 기반으로 작곡된 작품으로, 프랑스 서곡풍 아다지오와 푸가가 쓰였다. 작곡가들이 이전 시대의 스타일과 형식을 사용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시기로 변해가는 과도기에는 상황이 사뭇 다르게 전개되는 법이다. 바로크의 정점을 찍은 바흐가 1750년에 세상을 떠나기 전부터 바로크 시대의 스타일과 양식은 이미 구시대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모차르트가 이 작품을 작곡한 1783/1788년은 바흐 사후 30년 이상이 지난 때였다. 이 작품의 푸가에서 화음챔버는 소리의 끈을 단단하게 부여잡았는데, 어느 파트 하나 밀려나는 법 없이 모든 파트의 활약이 돋보이는 연주를 들려주었다.
이번 연주를 위한 공모 당선작 김준호의 ‘화음프로젝트 Op.211 Urban Motion’은 옛 것과 새 것의 공존을 도시의 움직임을 통해 표현한 작품이다. 다양한 음악적 요소들을 결합해 도시의 면면을 4개의 곡을 통해 묘사했다. 21세기 한국의 젊은 작곡가가 포착한 회색 콘크리트 숲에서 사는 도시인들의 움직임은 대체로 암울하다. ‘Dance under the Neon light’는 “사이키델릭한 조명 아래 술 취한 말뚝이의 탈춤을 상상”한 작품으로, 자기의 주인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말뚝이라는 전통적인 캐릭터를 사용해 생존을 위한 가면을 쓰고 현기증 나는 춤을 추는 도시인을 한국적인 색채를 덧입혀 표현했다. ‘Lethargic Waltz’는 바로크 시대 궁중춤곡인 왈츠를 사용했는데, 우아한 춤곡이 아니라 비애에 찬 춤이다. 춤에 달린 무거운 감정의 무게는 사뿐하게 뛰는 왈츠와는 대조적으로 우울하고 둔감한 움직임을 만들었다. ‘Obsessive Energy’에서는 옛 스타일인 푸가토를 사용해 도시의 발전 뒷면에 자리한 헤어나기 힘든 현대인의 황폐한 모습을 자조적으로 표현했다.
이 작품에 담긴 도시의 움직임은 모든 것이 뒤섞이고 뒤틀려있다. 비관적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젊은 작곡가가 날카로운 시각으로 이 움직임을 병적인 것으로 표현한 것에 또한 희망의 근거도 있다고 본다. 단순히 비판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면, 현재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음악적 비전을 찾는 것이 창작을 이어가는 관건이 될 것이다.
2부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아폴로, 뮤즈들의 리더’였다. 스트라빈스키는 전통을 새로운 음악을 만드는 생생한 힘으로 생각했다. 프로그램 노트에 의하면, 이 작품은 “그리스 신화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고”, “음악 내적인 면에서 명료한 텍스쳐와 균형미를 지닌 형식을 지닌다는 점에서 신고전주의를 표방하는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스트라빈스키가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이며 작품이 가진 신고전주의적 특징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 작품이 이날 연주회를 위한 효과적인 선택인지 의문이 남는다. 이 작품은 순수 관현악작품이 아닌 발레음악이다. 이것은 음악과 발레가 결합해서 하나의 온전한 작품으로 완성된다는 의미다. 작곡가 자신도 조지 발란신이 안무를 맡은 무대를 중요한 공연으로 평가했다고 한다.
이날 2부에서 단독으로 연주된 10악장 구성의 이 작품을 들으면서 어딘지 음악이 허공에 뜨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한 내용이나 발레 음악이라는 특성 때문이 아니었다. 연주력과 작품 자체에 대한 문제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이고 핵심적인 그 무엇이 빠져있다는 느낌은 마지막 10악장의 장중하고 풍성한 현의 울림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레퍼토리를 가장 효과적인 형태로 전달할 수 없다면 다른 대안을 찾았으면 어땠을까? 이날 ‘온고지신: 신고전주의’ 렉쳐 콘서트를 이끄는 주요 작품으로 스트라빈스키의 ‘아폴로, 뮤즈들의 리더’를 고른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아쉬운 선택이었다.
도전과 응전의 정신
스트라빈스키는 전통을 새로운 음악을 창작하게 하는 생생한 힘으로 여겼다. 음악적 현재를 풀어나갈 중요한 실마리를 과거에서 찾아 새로운 음악적 현실을 창조하는 정신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감영병으로 인한 전세계적 위기, 그로 인한 일상생활의 혼돈과 다음날 연주회를 열 수 있는지조차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무대를 지킨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큰 음악적 성취를 이룬 것 이상의 인정과 격려를 받을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연주회를 계속 이어가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서두에 언급했듯, 20세기에 탄생한 신고전주의는 전후의 열악한 상황에서 음악 내적 외적 요인이 결합하면서 탄생한 일종의 위기극복 프로젝트였다. 시대와 상황은 변했지만 극복해야 하는 현실이라는 조건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제한된 현실을 돌파하기 위해 지켜야 할 것을 옛 것에서 가져와서 새롭게 살려내는 것, 과거와 현재를 살려냄으로써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정신. 이것이 바로 새로운 고전을 만드는 정신 아닐까? 화음챔버는 실내악의 척박한 땅에서 4반세기를 버텨온 뚝심과 맷집이 있는 단체다. 도전과 응전으로 빛나는 역사를 써내려온 단체다. 21세기의 현실을 극복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변함없는 주체로서 화음챔버의 활약을 기대한다.
서주원 (bwv1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