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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畵/音.zine vol.10] 畵音​ 30년 특집 인터뷰 I: 박상연 예술감독 '畵音, 문화의 에너지'
안정순 / 2024-06-01 / HIT : 254

畵音​ 30년 특집 인터뷰 I: 박상연 예술감독

畵音, 문화의 에너지

안정순 (음악학박사, 음악평론가)

 

 

  오월의 첫째 주 금요일, 송화가루가 눈과 코를 간지럽히던 날씨였다. 서초동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악보를 읽고 있는 박상연 감독님의 뒷모습이었다. 우직함과 진중함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박 감독님은 1993년 실내악단 화음으로 시작해 이제는 31년째 화음챔버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화음의 과거를 반추하고 미래를 상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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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순: 먼저 소중한 시간을 내어주셔서 감사해요. 아주 먼 과거 이야기지만, 실내악단 화음을 창단한 동기와 계기가 궁금합니다.

 

박상연: 그 이야기를 하려면 제가 유학하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해요. 저는 별로 외로움을 못 느끼는 성격이라 독일 유학 시절에도 외로움이란 걸 전혀 몰랐어요. 아마도 호기심이 외로움보다 더 컸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호기심이 사라질 즈음 갑자기 외로움과 낯설음이 몰려왔어요. 그때가 독일 라인란트팔츠 국립교향악단 객원 비올리스트로 활동하던 시절이에요. 그때 고향에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모든 걸 접고 귀향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후 여러 가지 음악 활동으로 바빠지니까 내가 원했던 삶과는 거리가 먼 생활이 되었어요. 결국 KBS 교향악단을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활동을 정리하고 잠시 시골로 내려왔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디에 정착할지 장소를 물색하던 중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왜 사람들은 꿈과 현실을 다르게 생각할까? 꿈과 현실이 동일할 수는 없는 건가? 이 두 가지가 동일할 수 있도록 실천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나 혼자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사회를 그렇게 만들어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개인적인 제가 '우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제가 '우리’라고 표현함은 역사와 문화의 한 부분이라는 의미예요. 사실 저는 화음을 시작할 때부터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의식을 갖고 시작했거든요. 시간이 지나면 화음의 활동이 중요한 역사가 될 것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생각하고 기획했죠. 우리 사회, 문화, 역사라는 토대 아래 예술적으로 완성도를 높이며 발전 가능한 단체를 만들고 싶었어요.

 

안정순: 역사와 문화가 '우리'라는 의식에 담긴 거군요. 독일에서 연주 단체를 시작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한국에서 시작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혹은 단체에 구체적으로 기대하는 모습이 있었나요?

 

박상연: 비유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화음을 쭉쭉 뻗었지만 결국 가구의 목재가 되고 마는 좋은 품질의 나무로 키우고 싶지는 않았어요. 차라리 동해 바닷가의 볼품없는 해송이라도 우리의 토양에서 키우고 싶었죠. 제가 말하는 토양은 지역적, 지리적 의미라기보다는 우리가 사는 문화를 의미해요. 연주자들은 보통 '어떻게’에 관심을 두거든요. 그런데 저는 '왜’, '무엇을’을 고민했던 것 같아요. 완성도보다는 연주의 컨셉과 접근하는 방식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비록 전통적인 해석이 아니더라도, 조금 연주의 질이 떨어지더라도, 우리만의 소리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예술적 관점을 갖고 싶었던 거예요. 여기에는 우리의 문화와 사회에 대한 사고가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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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실내악단 화음'의 삼풍갤러리 연주

 

 

안정순: 실내악단 화음의 활동은 어떻게 운영되었나요? 그 후 1996년 화음챔버오케스트라 결성 당시의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박상연: 실내악단 화음은 삼풍백화점 갤러리에서 연주를 했어요. 백화점 안에 있는 갤러리다 보니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리면 사람들이 슬쩍 훔쳐보고 들어왔죠. 그 당시에는 후원이 아닌 회원제로 잘 운영되었어요. 그러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활동이 중단되었죠. 1996년 화음챔버오케스트라를 결성하기 위해 직접 전화를 하며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았어요. 그런데 동료들 대부분이 이미 다른 연주 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어서 이중으로 활동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새롭게 멤버를 구성하게 되었어요. 챔버오케스트라 창단 연주 2회 때부터는 배익환, 조영창, 라이너 목, 미치노리 분야 이렇게 네 명의 리더 그룹이 활동을 시작했어요. 나중에 마티아스 부흐홀츠​가 합류했죠.

 

안정순: 그렇게 직접 다 모으신 거군요. 그럼 단체를 창립할 때 추구하는 가치관이 있었나요?

 

박상연: 네. 창립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지키고 있는 세 가지 가치관이 있어요. 첫째, 화음 활동을 통해 예술적 경험, 자기 확장의 경험을 하는 것, 둘째, 이해관계가 없을 것, 셋째, 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고민하고 그 가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먼저 예술적 경험을 하지 않으면 우리가 하는 이 행위들이 그저 소비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예술적 경험을 한다는 것은 각자의 ‘새로운 창’을 만든다는 거예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초창기 시절 당시 참여했던 동료 음악가들의 경우 악단 활동이 바로 삶과 연결되었어요. 연주와 일상이 공유되는 이상적인 삶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두 번째 가치관인 이해관계의 문제에 대해서는 먼저 당시 상황에 대한 배경 설명이 필요해요. 90년대에는 앙상블 단체를 결성하는 것을 음악계 내에서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던 경향이 있었어요. 저는 이러한 이해관계의 문제는 화음의 세계관과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여러 가지 한국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난 단체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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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순: 90년대 화음챔버에 관한 기사를 살펴보았어요. 재미있었던 기사 제목을 몇 가지 소개해 드릴게요. "될성부른 떡잎, 세계를 넘봄”, "화랑에서 왠 연주회”, "세계 정상의 화음 가능성을 연주한다”, "실력파 영입” 등입니다. 물론 기사의 제목은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한 목적에 충실한 점이란 것을 감안해야겠죠.

 

박상연: 그 시절에는 보통 무대의 불빛 아래서 턱시도를 입고 여자는 드레스를 입고 클래식 음악을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이런 음악에 대한 잘못된 환상을 깨고 싶었어요. 음악을 예술이라는 환상에 두는 게 안타까웠어요. 오히려 예술의 본질에서 멀어지는 것 같았죠. 예술은 함께 숨 쉬는 공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음악, 미술만이 아닌, 노동에도, 학문에도 예술이 있다고 봐요. 식물로 비유하면 예술은 그저 꽃이에요. 꽃은 꽃만 있는 게 아니라 줄기도 있고 뿌리도 있잖아요. 1993년 화랑음악회의 시작에는 이런 생각이 바탕에 있었죠. 1996년 챔버오케스트라로 활동했을 때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어요. 굉장했죠. 당시에는 연주력에 승부를 걸기도 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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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화음챔버오케스트라 창단연주회를 준비하며

 

 

안정순: 기사를 살펴보던 중 더 특이했던 점은 감독님이 이 단체의 대표라는 것이 별로 언급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박상연: 맞아요. 사실 90년대부터 제가 대표를 했지만, 제가 전면에 드러나진 않았을 거예요. 보통은 악단을 만들 때 대표의 얼굴을 보고 만드는데요. 저는 깃발을 들었을 뿐, 저 스스로도 그저 구성원이라 생각했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음악감독이라는 표현도 사실 적절치 않다고 생각해요. 물론 지금은 지휘를 하면서 다소 대표성을 띠고 있지만 화음의 주체가 저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이 행보를 이어갈 생각은 분명하지만요.

 

안정순: 화음 초창기에는 지휘자가 없었군요.

 

박상연: 지휘자가 없고 상하관계가 부재하며 토론을 통해 합의한다는 점이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주요 특징이죠. 물론 요즘은 제가 지휘를 하기는 하지만 지휘자가 있건 없건 실내악처럼 운영하고 있습니다. 서로 토론하고 함께 해석하죠. 의견을 묻기도 하구요. 이렇게 하면 '효율성’이 떨어지게 됩니다. 효율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토론할 시간이 없죠. 때로는 연습 시간을 줄여 현실과 타협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현악이 중심이다 보니까 음색이나 음질에 신경을 더 쓰긴 해요. 리허설을 충분히 해도 실전에서 충분히 발휘되진 않지만, 그럼에도 열 번의 노력에서 하나라도 건진다면 열 번의 노력을 불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흔히들 앙상블은 비슷한 톤의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게 좋은 소리를 낸다고 하죠. 저는 화음챔버가 오히려 들쑥날쑥 부딪히면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만들고 싶어요.

 

안정순: 2002년부터 화음프로젝트를 시작하셨는데요. 시작하신 동기와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세요.

 

박상연: 당시 창작음악을 프로그램에 넣는 것은 생소한 분위기였어요. 저희는 갤러리라는 환경과 주제가 있었고, 전시에 대한 공감대가 있는 상태에서 작곡가가 작품 설명을 곁들이니 창작음악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6분을 채 넘기지 않을 정도로 짧게 곡을 소개했어요. 이것을 '화음의 자화상 프로젝트’로 불렀죠. 그런데 갤러리에 오신 분들이 제목을 보시고 자꾸 자화상을 찾는 거예요. (웃음) 그래서 이름에서 자화상을 빼는 것으로 수정을 했습니다. 갤러리라는 공간은 전략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열려 있는 공간이에요. 저는 음악과 미술이 은밀하게 만날 때는 서로의 본질이 만난다고 생각해요. 각각의 예술 장르가 상호 연관을 지으면서 여러 가지 차이가 나지만, 그럼에도 본질은 통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화음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할 때 지원이 없었어요. 이런 상황에서도 부족하지만 작곡가들에게 소정의 작곡료를 지불했습니다. 작곡가들이 작곡료를 받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죠. (웃음)

 

안정순: 갤러리가 창작음악의 현실적 발판이 된 거네요.

 

박상연: 그런 셈이죠. 사실 모든 작품은 다 창작음악이에요. 솔직히 저는 창작음악이라는 말로 구분해서 쓰는 걸 좋아하지는 않아요. 제가 생각하는 현대음악은 제 친구들이 만든 음악이에요. 음악가이자 예술가로서 제 삶을 표현하려면 창작음악 혹은 현대음악이 절실하죠. 창작음악이 있기 때문에 다른 모든 행위들이 이유를 찾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창작이나 현대음악보다는 ‘현장음악’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어요. 베토벤도 바흐도 바로 현장으로 불러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인류의 위대한 유산인 건 부인할 수 없어요. 문제는 현장에 우리의 창작음악이 빠지면 현장의 개념이 없어져 버려요. 이게 제가 음악 활동을 하는 이유인 것 같아요. 물론 모든 사람이 저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고전의 음악을 연주하는 데 가치를 두는 사람도 있다는 걸 인정합니다. 서로의 가치가 다르다는 것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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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서호미술관에서 열린 화음프로젝트 음악회

 

 

안정순: 『음악, 그리고 이야기』에 실린 ‘화음 30년을 소회하며’에서 화음의 실체에 대해 언급하신 것을 읽었습니다.

 

박상연: 화음의 실체에 대해 오랜 기간 고민해 왔어요.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플랫폼 정도로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홈페이지가 활성화된 뮤지엄이 되어 단순히 아카이브 기능뿐 아니라 모든 자료들이 유기적으로 새로운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능을 했으면 합니다. 뮤지엄이 그렇잖아요? 제가 바라는 건 이러한 소장품이 재해석, 재평가되는 기능과 함께 새로운 공연을 만들 수 있는 콘텐츠를 끊임없이 가능한 상태인 플랫폼이 되어 살아서 움직이는 작품을 만드는 것을 기대하죠. 연주, 작곡은 화음챔버오케스트라가 잘하고 있고, 이제 이를 해석하는 청중의 역할을 하는 비평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연주, 작곡, 비평은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안정순: 평론상이라고 했지만 사실 이를 확장하면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만들고 재생산하는 문화를 만들고 싶은 거라고 이해가 됩니다.

 

박상연: 맞아요. 저는 그런 문화를 가진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죠. 제가 플랫폼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그것이 조직화되지 않고도 유기적인 반응과 더불어 가치와 관계에서 스스로 파생되는, 그러니까 다른 관점이 통용되는 문화를 만들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걸 ‘에너지’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30년 전 저만 알아볼 수 있게 메모해둔 표현이죠. (웃음) 이것은 제가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저는 화음을 통해 끊임없이 생성되는 에너지를 꿈꿉니다.

 

안정순: 지금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부터 공연예술 중장기창작지원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오랜 기간 CJ문화재단이 후원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도 후원이 잘 유지되고 있나요?

 

박상연: 화음은 CJ그룹과 약 30년간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오랜 기간 지속된 경우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한국의 근현대사에 유일무이한 일일 겁니다. 다들 어느 정도 유지하다가 중단되는 일이 허다하죠. 사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CJ문화재단의 후원으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어요. CJ문화재단으로 인해 서호미술관을 벗어나 다른 곳에서도 공연을 할 수 있었고, 후원 덕분에 미술 작품과 연관된 작품들이 만들어졌죠. 예술 단체를 지원하는 문제는 사회의 문제와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예술과 사회의 문제는 정말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죠. 그런데 기업은 단순히 경제력이 있다고 해서 예술 단체를 지원하지는 않습니다. 기업은 가치가 있는 일에 돈을 쓰거든요. 예술 단체는 후원이 없으면 그 활동 자체가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이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변의 진리죠. 언젠가 CJ그룹이 화음을 후원한 것을 좋은 투자라고 생각할 날이 오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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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18일 화음챔버오케스트라 음악회

 

안정순: 향후 약 10년 이내에 화음을 통해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박상연: 10년이 아니라 5년 이내에 이루고 싶은 게 있어요. 대충 얘기한다면 플랫폼 기능이 활성화되고 콘텐츠가 재생산, 확산되는 기반을 다지고 싶습니다. 작곡, 연주, 비평이 구조화되고 구체화되어서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문화를 꿈꿔요. 지금까지의 화음의 활동은 공감을 얻는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평론가의 역할이 중요해요. 연주자는 예나 지금이나 항상 중요하죠. 그러나 연주자는 현실적으로 타 단체의 활동을 병행하기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단체에 소속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거든요. 그러나 평론은 공연과 사회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기 때문에 향후 단기간 플랫폼의 구체적 모형을 만들기 위해서는 비평 혹은 평론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통해 충분히 짐작하겠지만 화음의 실체는 직업 오케스트라와는 다릅니다. 직업 오케스트라는 그 자체가 실체라 할 수 있지만, 화음은 그렇지 않아요. 제가 만들고 싶은 실체는 화음을 사회와 선순환되는 하나의 문화로 만들고 싶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플랫폼 기능이 활성화되면서 동시에 새로운 예술 작품으로 이어졌으면 합니다. 예컨대 작곡, 연주, 비평을 녹여낸, 즉 화음의 모든 활동을 미디어아트로 담아내고 싶어요. 미디어아트는 하나의 예구요. 조각과 같은 방법으로 형상화하는 방법도 가능하죠. 전 궁극적으로 우리가 만든 콘텐츠가 또 다른 작품으로 파생되는 걸 기대해요.

 

안정순: 솔직히 지금 감독님이 그리시는 바가 즉각적으로 이해되진 않아요. 그런데 30년 전의 기사를 훑어보니 지금의 화음의 모습과 연결이 되더군요. 그런 것처럼 분명 시간이 지나면 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마지막으로 30년을 경과하는 이 시점에 화음챔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박상연: 지금까지의 설명을 통해 충분히 표현했지만, 예술적 활동과 제 일상은 섞여 있는 것 같아요. 화음이라는 문화를 만들어가는 연주자, 평론가, 작곡가를 포함한 우리에게 '일상이 예술이면 좋겠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를 반대로, ‘화음도 일상처럼 했으면 좋겠다’라는 말로 대신하고 싶습니다. 혹시 이 말이 어떻게 들리세요?

 

안정순: 전 절실하게 하라는 얘기로 들리는데요.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나누는 것이 무의미하고, 내 일상이 소중한 만큼 예술이 중요하다는 말이죠? 아니 일상이 중요하다는 얘기인가요? (웃음)

 

박상연: 결국 예술이 가치가 있다는 겁니다. 일상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니까요. 저는 모든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상처럼 했으면 좋겠어요. 저는 농사를 짓는 일, 정치를 하는 일 등 모든 삶은 다 예술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화음에 대한 얘기는 해도 해도 정말 끝없이 할 수 있어요. 여하튼 지금까지 화음은 꾸준히 발전했고 이것은 기적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어요. 한국의 토양이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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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간 화음을 운영하면서 좌절을 느낀 적은 없냐는 질문에 박 감독님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없다’라고 대답했다. 그 이유는 자신이 현실에 발을 디딘 채 가치를 실현하고 있고, 꿈과 현실을 분리하지 않고 동일하게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예술과 일상, 그는 둘 중에서 예술이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에게 이러한 고리타분한 이분법적 경계는 무의미하다. 그는 예술이 일상인 만큼 일상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畵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