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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畵/音.zine vol.7] 음악과 미술, 그 재현의 원리로 보는 시대의 흐름
안정순 / 2023-09-01 / HIT : 277

음악과 미술, 그 재현의 원리로 보는 시대의 흐름

안정순 (음악평론가, 음악학박사)

 

 

  음악과 미술은 청각과 시각이라는 주요 감각기관을 사용하여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는 두 예술 분야이다. 때때로 창작과정에서 서로에게 영감을 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음악과 미술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와 시대의 특징을 보존하고 전달하며 함께 시대의 변화를 재현하는 역할을 한다.

 

 

원근법과 평균율

 

  미술사에서 가장 혁신적인 발명 중 하나는 ‘선 원근법’(linear perspective)이다. 건축가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가 처음 고안한 것으로 알려진 이 원근법은 회화에서 거리감을 나타낼 수 있는 명암, 대기, 크기 등을 활용하여 원근감을 표현하는 기술이다. 즉 3차원의 현실적인 사물을 2차원의 평면에 재현하는 기술이다. 여기에는 하나의  ‘중심점’ 혹은 ‘소실점’이 필요한데 불행히도 실제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원근법이 사실적으로 공간을 묘사하는 것 같아도 인간의 눈으로 포착하는 실제 세계와는 엄연히 다르다. 이렇게 실제는 아니지만 실제처럼 보이는 것은 수학적 규칙성이 자연을 대체함으로써 가능하다. 즉 데카르트적 사고가 근저에 있다는 의미에서 이를 ‘데카르트적 원근법주의’라고도 부른다.

 

  음악에서도 데카르트적 원근법주의와 유사한 예가 있다. 바로 평균율이 그러하다. 자연배음에서 음정을 취하여 나열하면 피타고라스 음계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여기에는 태생적으로 피타고라스 콤마라 불리는 음정의 불일치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방법들이 동원되었지만 결국 강제로 12개의 음을 동일한 간격으로 균등하게 분할하여 만든 평균율로 정착되었다. 평균율은 자연배음과는 엄연히 다르며, 수학적 규칙성을 일종의 자연에 대입한 인위적인 합의의 결과이다. 평균율은 원근법과 마찬가지로 데카르트적 사고에 기반을 둔 것이다. 라모(Jean-Philippe Rameau, 1683-1764)의 ‘화성론’(Traize de l'harmonie)은 이런 토대 위에 정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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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사자공의 성복음집에 있는 한 페이지 1188년 양피지, 작자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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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ast Supper, Leonardo Da Vinci​ 1495-1498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

 

  여기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1564)와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 1598-1680)의 <다비드> 조각상이 있다. 이들은 르네상스와 바로크 예술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전자는 르네상스 시대의 조화와 균형이라는 가치를, 후자는 뒤틀림과 역동성이라는 바로크 시대의 가치를 담아낸다. 

 

  바로크의 어원은 ‘baroco’라는 포르투갈어로 이미 그 안에 경멸과 비난을 내포한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을 갖는다. 어원에 대한 장황한 설명보다 미켈란젤로와 베르니니의 두 조각상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음악적 특징이 단번에 와 닿는다. 두 시대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이보다 더 좋은 예시가 있을까. 르네상스 음악이 철저한 대위법에 근거한 다성 음악으로 조화와 비율을 강조한 음악이라면, 바로크 음악은 가사를 잘 들리게 하기 위해 베이스와 소프라노 선율이 비정상적으로 과장되어 있어 불협화적이고 극적인 음악이다. 이러한 바로크 시기 음악의 특징에 대해 구구절절 힘들게 설명을 듣는 것보다 베르니니의 <다비드> 상을 한 번 보는 게 백번 낫다. 바로 ‘백문이 불여일견’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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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Michelangelo 1501-1504 Florence, Galleria dell'Accadem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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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Gian Lorenzo Bernini 1623/1624

 

  

음악의 근대적 시간성

 

  여기 또 다른 두 개의 그림이 있다. 하나는 1639년에서 1640년경에 그려진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의 <시간의 음악에 맞춰 춤을>(Il ballo della vita humana)이라는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1791년 작인 티에폴로(Giandomenico Tiepolo, 1736-1776)의 <새로운 세상>(Il Mondo Novo)이라는 작품이다. 푸생의 그림 속의 사람들은 리라에 맞춰 원을 그리며 춤을 추고 있고, 그들 위에는 신의 세계가 있다. 그림 속 푸생의 시간은 순환적이다. 해가 뜨고 지고, 어김없이 돌아오는 사계절처럼. 반면 티에폴로의 그림 속의 사람들은 일렬로 줄을 서 있다. 모두 한 방향을 향해 신문물을 구경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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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Dance to the Music of Time, Nicolas Poussin​ ca 16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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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 World, Giandomenico Tiepolo​ 1791

 

 

  영미음악학자 캐롤 버거(Karol Berger)의 저서 『바흐의 순환, 모차르트의 화살』(Bach’s Cycle, Mozart’s Arrow)에서는 음악의 근대성을 설명하기 위해 위의 두 그림이 등장한다. 버거는 티에폴로의 그림 속의 사람들이 푸생의 그림과는 반대로 역사적인 시간을 살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들의 시간은 선적 시간으로 진보하는 근대적 시간이다.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버거는 푸생의 그림 속 순환적 시간을 대변하는 예로 바흐의 음악을, 티에폴로의 근대적 시간에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대입한다. 하나의 주제가 대위법적으로 물고 물리며 이어지는 푸가와 분명한 조성의 목적과 방향성을 가진 소나타를 각각 순환적이고 선적인 이미지로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아주 먼 옛날부터 미술은 이미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기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려고 했다. 음악도 있는 소리를 단순히 재생하기보다 무언가를 음으로 만들어 표현했다. 중세시대 익명의 화가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미켈란젤로와 베르니니의 <다비드> 조각상, 푸생과 티에폴로의 그림은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모방이 아니라, 관점의 변화를 포착하여 재현한 것이다. 특히 음악에 있어 재현의 원리란 본디 타고난 추상성 때문에 구차한 설명이 필요치 않으리라. 결국 세상은 서서히 변하고 그 변화의 흐름은 음악과 미술이라는 예술의 형태로 재현되어 우리에게 남는다. [畵音]

 

 

<참고문헌>

박영욱 “원근법과 평균율의 상관관계에 나타난 미적 사유의 특성” 『통일인문학』 78호 (2019) 199-234

Karol Berger "Bach’s Cycle, Mozart’s Arrow: An Essay on the Origins of Musical Modernity" Londo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7)

Grout, Donald J., Palisca, Claude V. and Burkholder, J. Peter "A History of Western Music"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Ltd.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