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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畵/音.zine vol.4] 17-18세기 나폴리 음악원의 음악교육법
안정순 / 2022-12-01 / HIT : 506

17-18세기 나폴리 음악원의 음악교육법

안정순 (음악학박사)

 

 

음악신동과 즉흥연주

 

사람들은 보통 음악신동이라 하면 모차르트가 떠올린다. 그래서일까? 피아노 앞에 앉은 꼬마 모차르트와 그 옆에 서서 바이올린을 켜는 아버지 레오폴트의 이미지를 그 당시의 음악교육의 전형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 기록에 따르면 그 시대에 가정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배우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17-18세기에 흔한 음악교육 방식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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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가족, 레오폴트, 볼프강, 난넬 / 수채화 (Carmontelle, 1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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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트와 아들 모차르트

 

몇 해 전 미국의 한 매스컴에서 영국계 어린 꼬마 아가씨가 음악신동으로 소개되며 세간의 관심을 끌었던 적이 있다. 꼬마 아가씨의 이름은 알마 도이처(Alma Deutscher)로, ‘이 시대 또 다른 모차르트’로 불렸고, 사이몬 래틀(Simon Rattle), 앤 소피 뮤터(Anne-Sophie Mutter) 등과 같은 유명 지휘자와 연주자들은 꼬마 아가씨 알마의 연주와 작곡 능력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사실 음악 연주 분야에 신동의 출현은 상대적으로 꽤 흔한 일이다. 알마의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력은 물론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바로 즉흥연주에서 출발하는 작곡 능력이었다. 그리고 그 보다 더 흥미로웠던 점은 알마의 대담한 즉흥연주 방식이 바로 18세의 음악, 진짜 모차르트를 떠오르게 했다는 점이다. 

 

 

유럽의 길드 문화와 음악의 도제식 교육

 

17-18세기의 음악교육방법에 대한 관심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음악이론가이자 음악인지학자인 로버트 여딩엔(Robert O. Gjerdingen)은 전통적 음악사 서술에서 ‘전고전주의’로 묶여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이 시기의 음악에 관심을 불러일으킨 학자이다. 여딩엔은 18세기 이탈리아 나폴리 음악원에서 사용했던 일종의 교육용 베이스 선율을 알마에게 제공하고, 즉흥연주방식과 작곡기법 등 알마의 음악교육에도 실제 관여하기도 하였다.

 

유럽의 수공업 길드 문화는 수공업을 넘어 법학과 미술 분야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물론 음악분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길드 문화는 훌륭한 장인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도제식 교육 방식과 관계가 있다. 중세부터 근대까지 유럽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수십 개의 길드가 존재했고 길드 회원들은 수공업 기술을 독점적으로 사용하였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음악과 예술에 대한 개념은 1800년대 중반에서야 발생한 것으로, 17-18세기의 음악은 이러한 도제식 교육의 영향에 있었다. 훌륭한 음악가가 되기 위해서는 훌륭한 마에스트로를 찾아야했고, 음악가가 된다는 것으로 미래의 성공을 보장받았다. 고아가 아니더라도 당시 재능이 있는 젊은이들은 고향을 떠나 당대 최고의 스승이 있는 나폴리로 몰렸다. 그리하여 17-18세기에 나폴리는 명실공히 음악교육의 메카가 되었다. 

 

 

음악교육의 메카 나폴리 음악원

 

16세기 항구도시 나폴리에는 가난과 빈곤 속에서 잠시 머물던 항해사들로 인해 많은 고아와 고아원이 생겨났다. 고아들 중에는 본디 귀족 출신의 사생아들뿐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성공한 음악가가 되고자 하는 학생들도 섞여 있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러한 아이들을 돌보는(conserve) 콘서바토리를 만들었고, 고아들은 부모의 도움 없이 살아남기 위해 기술을 익혀야 했다. 당시 나폴리에는 극장, 교회, 궁정들이 많아서 음악가들이 일자리를 구하기가 쉬웠다. 특히 교회는 17세기 중반부터 전문음악가를 고용하여 쇼 비즈니스에 깊게 관여하며 음악원의 발전과 음악가를 배출하는 데에 한몫하였다. 교회는 음악원을 통해 필요한 음악가를 공짜로 구할 수 있었고, 재능 있는 학생들은 생계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성공을 보장받았다. 18세기 나폴리에는 4개의 음악원이 있었으며, 수백 명의 아이들이 여기에 머물렀다. 유럽 전체에 활동한 작곡가 중 75%가 나폴리 출신임을 볼 때 그 영향력이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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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s://www.youtube.com/watch?v=fED17Td8heA&;t=677s)

 

나폴리 음악원은 교육을 오래 받은 선임 학생들이 어린 신참 학생들을 다시 교육하는 순환식 체계를 갖고 있었다. 우리에게 친숙한 알렉산드로 스카를라티(Alessandro Scarlatti, 1660-1725)는 나폴리 음악원의 대표적인 음악 선생이었다. 그 외에도 음악사에 등장하는 빈치, 레오, 페르골레지, 포포라, 파리넬리, 욤멜리 등이 나폴리 음악원 출신이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발생한 정치와 경제적 혁명으로 인해 음악교육의 메카였던 나폴리 음악원은 유지조차 쉽지 않았고 점차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그랜드 투어를 통해 전파된 이탈리아 문화

 

늘 크고 작은 전쟁에 시달리던 유럽은 18세기 초까지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치렀다. 그러다 1713년 체결된 위트레히트 조약(the Treaty of Utrecht)으로 잠시나마 평화의 시기를 맞는다. 이때 유럽, 특히 영국과 독일 지역의 많은 지성인들은 르네상스의 조국이자 가톨릭의 본거지인 이탈리아 남부로 여행을 떠났다. 한 번 떠나면 몇 년이 소요되는 여행은 특별히 ‘그랜드 투어’(The Grand Tour)라 불렸는데, 이를 통해 지성인들은 유럽의 문화의 뿌리를 체험할 수 있었다. 특히 그랜드 투어는 음악분야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모차르트 또한 수차례의 여행을 통해 유럽 여러 지역의 다양한 음악적 양식을 빠르게 습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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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9년 12월에서 1771년 3월까지의 이탈리아 여행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Mozart_in_Italy)

 

당시 그랜드 투어를 감행한 지성인들 중에는 영국 음악역사가이자 작곡가였던 찰스 버니(Charles Burney, 1726-1814)도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하이든(Franz Joseph Hadyn, 1732-1799)의 친구였던 버니는 작곡자이기도 했지만 음악역사학자로 더 유명하다. 찰스 버니는 이탈리아 남부로의 여행을 기록하면서 당시 나폴리 음악원의 분위기를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버니가 남긴 기록물은 나폴리 음악원의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버니는 당시 전 유럽에 영향을 끼친 스카를라티, 빈치, 레오, 페르골레지, 포포라와 같은 음악가들이 교육을 받은 이탈리아 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그는 1770년 여름에 이탈리아 남부를 향해 토리노, 밀라노, 볼로냐, 피렌체, 로마 등을 경유하며 여행을 했다고 썼다. 그러나 산 오토프리오 음악원에 도착해서 한 학생의 가이드를 받으며 음악원을 둘러보면서 버니는 당황하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놀란 건 터질 듯 불어대는 트럼펫 소리이다. 두 번째로 놀란 건 프렌치 호른 소리였다. 연습실에서는 각개 전투가 펼쳐졌는데 7~8개의 하프시코드와 바이올린이 다른 조성으로 전혀 다른 곡을 각각 연습하고 있었다. 〔...〕 소년들은 동트기 2시간 전에 일어나서 연습을 하고 저녁시간 먹는 시간 한 시간 반을 제외하고 늦은 8시까지 연습을 했다.  

 

여기까지가 버니가 경험한 음악원의 모습이다. 버니가 묘사하는 나폴리 음악원의 풍경은 참으로 특이하다. 버니는 거기서 5일을 머물렀는데 음악원 안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소음과 불협화적인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고 했다. 버니에 따르면 나폴리 음악원은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여기 저기 연습으로 인한 소음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본래 고아원의 기능도 하던 곳이지만, 그래도 유명한 마에스트로가 있기에 품격 있는 음악교육의 모습을 기대했던 버니는 당시 유행한 이탈리아의 단순한 아름다운 매력의 갈랑음악과는 대비되는 시장 바닥처럼 소음으로 가득한 초라한 교육 현장에 당황하고 실망한 채 돌아갔다. 

 

 

나폴리 음악원의 비밀병기 파르티멘토

 

그러나 버니가 경험한 것은 그저 음악원의 외부 모습일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나폴리 음악원이 성공할 수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인 음악교육방식을 파악하지 못하고 돌아갔던 것이다. 나폴리 음악원의 소음 속에서 그들이 연습한 것은 바로 파르티멘토(partimento)로, 일종의 교육용 베이스 선율이다. 이 선율을 바탕으로 학생들은 솔페지오(계명창)와 즉흥연주를 만드는 연습을 하였다. 나아가 스키마(Schema)의 형태를 띠는 베이스 선율과 멜로디의 조합을 학생들은 구구단을 외우듯 암기하고, 변형하는 연습을 하였다. 아마도 버니가 묘사한 7~8개의 하프시코드 연습생들은 아마 단순 암기방식으로 파르티멘토를 연습 중이었던 것이다. 학생들은 교육용 베이스 선율인 파르티멘토 통해 특정 프레이즈와 종지, 시퀀스를 암기하여 음악을 말할 수 있도록, 머릿속으로 재현하는 연습을 쉬지 않았다. 버니는 이를 단순히 ‘반주’와 ‘대위’정도로 생각하고 이것의 진짜 의미를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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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란테(Francesco Durante, 1684-1755)의 파르티멘토

 

수 세기에 걸쳐 예술에 대한 미학적 가치의 변화를 겪은 21세기 현재의 우리에게 나폴리 음악원에서 사용한 파르티멘토와 스키마는 그저 박물관에 있어야 할 과거의 유물 정도로 이해될 지도 모른다. 나폴리 음악원의 비밀병기였던 파르티멘토는 18세기 작곡가들이 유독 다작을 많이 한 근거 중 하나이다. 악보라는 시각적 요소에 다소 치우친 요즘 교육과 대비되는 17-18세기 나폴리 음악원의 교육방식은 ‘듣고, 따라하고, 암기하고, 조합하여 변형’하는 마치 음악을 언어처럼 ‘듣고, 말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어린 학생들은 이런 식의 음악하기를 통해 심지어 언어보다 앞서 음악작곡하기를 습득하기도 하였다. 나폴리 음악원에서 학습한 스키마는 음악가들에게 음악의 모국어가 되어 당대와 후대의 작곡가들, 즉 당대와 후대의 음악인 고전과 낭만시기의 음악에 스며들었다​. [畵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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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Gjerdingen, Robert O. Music in the Galant Style.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Heartz, Daniel. Music in European Capitals: The Galant Style 1720-1780.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Ltd, 2003.

Rice, John. Music in the Eighteenth Century: Western Music in Context. W. W. Norton & Company Ltd,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