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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畵/音.zine vol.12] 음악의 형식을 제목으로 갖는 그림들
이민희 / 2024-12-01 / HIT : 78
음악의 형식을 제목으로 갖는 그림들 
 이민희(음악평론가, 음악학자)

  기악음악의 ‘형식’은 서양문명이 발명한 가장 위대한 유산 중 하나다. 천년이 넘는 중세와 이백 여년의 르네상스를 거쳐 1600년경의 바로크에 도달한 서구인들은 소리만으로 시간을 직조하는 방식을 터득했다. 조성과 장단조, 그리고 평균율이 일반화된 후에야 기악음악은 형식과 함께 급격하게 발달했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수많은 기악음악의 작곡가들이 탄생했다. 이후 형식들은 18세기 중반을 거치며 널리 수용됐고 19세기를 넘어가며 그 미학과 이론을 공고히 한다. 

  예컨대 음악학자 한슬릭(E. Hanslick)은 음악의 내용을 바로 이 ‘형식’에서 찾았고, 음악을 예술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올려 올려놓았다. 그래서였을까? 기민한 화가들은 음악의 영역에 있는 이런 ‘형식’을 소재로 삼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런 그림들에서는 추상적인 이미지들이 그 자체로 음악적인 율동감을 형성하기도, 화가가 가진 음악적 지식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림 안에 내포되기도 한다. 

  론도

  한국 추상주의 미술의 선구자인 김환기(1913-1974)는 한국적인 소재나 자연을 조형으로 변화시킨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흔히 ‘한국적 풍류’로 일컬어지는 달이나 산, 나무, 여인 등을 이미지로 형상화했고 이를 변용해 한국 고유의 미감을 현대화했다. 젊은 시절 김환기는 다양한 신미술 운동에 참여했으며 신사실파를 조직하고 모더니즘 운동에 가담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보다 추상적인 색채와 공간으로 가득 찬 작품을 내놓게 된다. 이러한 김환기의 작품 여정에서 눈에 띄는 작품 중 하나가 바로 <론도>(1938)이다. 

  론도(rondo)란 17세기에 발전한 형식으로 리토르넬로라고 불리는 후렴구와 에피소드라고 불리는 새로운 섹션이 교대로 반복되는 음악이다. 리토르넬로는 매번 유사한 음악적 내용을 들려주며, 조성 또한 동일하거나 가까운 범주에서 움직인다. 반대로 보통 독주자에 의해 연주되는 에피소드들은 자유로운 조성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러한 론도 형식의 묘미는 동일한 요소의 반복에 동반되는 새로운 요소의 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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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 <론도> (1938, 61x72cm, 캔버스에 유화물감)

  김환기는 바이올린을 연주했고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던 인물로, 자연스럽게 음악적 아이디어를 색채로 풀어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김환기의 <론도>는 고유의 색감과 입체파의 기하학적인 형태를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화폭 속 이미지들은 음악적 리듬을 내포하듯 배치됐다. 이 그림은 김환기가 이미 추상으로 급격히 나아갔음을 보여주는데 그는 “커다란 그랜드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과 이를 듣는 사람들을 구성적으로 단순화하여 그린 것”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의 의중을 반영하듯 화폭에는 피아노와 인체로 보이는 형태가 인지된다. 특히 작품 특유의 리듬감과 반복 그리고 경쾌함은 이 작품을 음악적 ‘론도’와 무리 없이 연결시킨다. 

푸가 

  조르주 발미에(Georges Valmier, 1885-1937)는 입체파 예술을 시도했던 프랑스의 화가다. 초상화, 풍경화, 정물화 등 다양한 회화를 남겼는데 무대세트와 의상을 제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음악교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접했고 본격적으로 미술을 전공한 이후에는 보수적인 화풍을 거부하고 당시 새로운 바람이었던 입체파에 몰두한다. 흥미로운 것은 발미에가 아마추어 음악가로도 활동했으며, 당대의 유명작곡가였던 미요(D. Mihaud)의 친구였고 동시대 작곡가의 다양한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가 1920년에 그린 <푸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음악에서 ‘푸가’란 모방대위 양식의 가장 완숙한 형태다. 여러 선율이 모방해 악곡을 이루던 ‘리체르카체’를 발전시킨 것으로, 17세기 들어 장단조 체계가 확립된 이후 완성됐다. 뚜렷한 특징을 갖는 주제선율이 조성을 달리하여 여러 번 반복되고, 여기에 대응하는 대선율과 에피소드 등이 존재한다. 본래 시작한 조성에서 먼 조성을 거쳐 다시 복귀하는 구조를 띄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성부 사이의 엄격한 모방이 등장한다. 주제 선율을 겹쳐 제시하거나, 주제 선율의 일부를 모티브로 활용하는 등, 작곡의 기술이 총망라되는 형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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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미에 <푸가> (Fugue, 1920, 12.6x17.2cm, paper collage with gouache and ink on paper)

  푸가의 이런 이성적 형태가 발미에의 <푸가>에서 어떻게 구현되었을까? 발미에의 <푸가>에는 시간과 리듬에 대한 능숙한 감각이 엿보인다. 율동적인 선들과 도형의 겹침, 그리고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색조의 풍부함을 볼 수 있으며, 작품 안에는 반달 모양의 형상이 여러 크기와 각도로 배치됐다. 이런 반달 모양들은 각각이 원형에 대응하는 변주 형태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면으로 구획된 사각의 배경은 분리된 조성의 영역을 연상시키며, 캔버스 전반에 균형감있게 배치된 모든 구성요소들은 ‘푸가’ 형식이 주는 안정된 구도를 꼭 닮았다. 

소나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은 프랑스의 미술가로서, 현대미술의 발전을 앞당긴 선구적인 인물이다. 미술가는 무언가를 모방한다는 미메시스 이론에 도전한 것은 물론 남자 소변기를 전시한 <샘>으로 평단을 충격에 몰아넣었다. 개념미술, 더 나아가 레디메이드개념의 창시자로도 유명하다. 예술작품이 존재하는 것이 작품때문인지, 관객때문인지, 아니면 미술관과 같은 기관때문인지 논쟁을 촉발시켰으며,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손수 만드는 관습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렇게 문제적인 뒤샹이 아직은 충격적인 시도를 하기 전 내놓은 작품이 바로 <소나타>(1911)이다.

  음악에서 ‘소나타’란 여러 악장으로 구성된 기악곡을 의미한다. 바로크 시대에 소나타가 처음 등장했을 때에는 어떤 편성으로 연주하는지에 따라 트리오 소나타나 독주악기를 위한 소나타 등으로 나뉘었고 후에 오케스트라를 위해 작곡될 때에는 특별히 ‘교향곡’이라 지칭된다. 보통 4개의 악장으로 구성되며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비엔나고전 시기에 이르러 대부분의 기악음악에 채택되며 널리 발전됐다. 소나타의 첫 번째 악장은 제시부, 전개부, 재현부로 나누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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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 <소나타> (Sonata, 1911, 145.1x113.3cm, oil on canvas) 
 
  뒤샹의 <소나타>는 그가 가족과 함께 1911년의 새해를 맞이할 때 그린 것으로 세 누이가 어머니 앞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누이 이본은 피아노를, 또 다른 누이 마들렌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으며, 쉬잔이 동생들 옆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특이하게도 그림의 정중앙에 있는 어머니는 귀가 먼 인물이다. 모든 이들이 각자 그리고 함께 존재하며, 인물의 배치나 구도가 소나타의 네 악장을 연상시키듯 동서남북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시대에 그려진 뒤샹의 다른 그림에서 볼 수 있는 해체와 파격이 다소 덜하며 반복이나 대칭 등 보다 고전적인 요소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아마도 <소나타>의 균형잡힌 구도는 ‘소나타’라고 하는 음악형식이 암시하는 조화를 일부 반영했기 때문은 아닐까. 

교향곡

  모리츠 폰 슈빈트(Moritz von Schwind, 1804-1871)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다양한 모습을 담아낸 초기 낭만주의 화가다. 기사나 성 등의 전원풍경을 자주 그렸으며, 작곡가 슈베르트와 친했던 사이로 슈베르트와 그 친구들의 모임이었던 ‘슈베르티아데’를 화폭에 담았다. 다만 유행하던 비더마이어 미술가로 분류된 탓에 당대 비엔나에서는 그 실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1828년에는 뮌헨 아카데미의 교수가 됐으며, 바르트부르크 성 프레스코화 등 대표작을 남기며 큰 인기를 얻게 된다. 슈빈트의 그림은 감상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으며, 순수한 서정성을 띈다. 큰 규모의 그림을 주로 그렸지만 동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따뜻한 색감의 평면 회화 작품도 유명한 것이 많다. 이러한 슈빈트의 작품 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이 1852년 선보인 <교향곡>이다. 

  음악에서 교향곡이란 ‘오케스트라를 위한 소나타’로서, 4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음악이다. 교향곡은 16세기 말 이탈리아의 오페라 서곡을 뿌리로 하며 18세기에 이르러 대규모 관현악을 위한 음악으로 널리 수용됐다.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교향곡에서부터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베토벤에 이르러 그 위상이나 규모가 확대된다. 1악장은 느린 도입부 이후 서로 대조되는 두 개의 주제가 나와 발전되고 재현되는 형태를 보여주며, 2악장은 느린악장으로 자유로운 형식을 갖는다. 3악장은 춤곡으로 작곡되는 경우가 많으며 4악장에서는 다시 두 개의 주제를 등장시키거나, 론도 등의 또 다른 형태를 시도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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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빈트 <교향곡>(A Symphony, 1852, 169x100cm, oil on canvas)

  슈빈트의 <교향곡>은 복잡하고도 시적이며 철학적인 작품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림 전체가 네 개의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이 구획이 “교향곡의 전형적인 부분들, 즉 1악장, 안단테, 스케르초, 알레그로에 상응”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즉 각각의 섹션은 각기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소나타의 1악장에 해당하는 섹션에서는 남자가 여인에게 호감을 느끼는 장면이, 2악장에 해당하는 섹션에서는 이들이 숲에서 만나는 모습이, 3악장에 해당하는 섹션에서는 가면무도회에서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그리고 4악장에 해당하는 섹션에서는 신혼여행을 떠나는 모습이 묘사되었다. 예컨대 네 개의 연속적인 이미지와 그것의 배열 및 조화는 ‘교향곡’ 자체를 평면으로 옮긴 것이다. 이러한 슈빈트의 <교향곡>은 예술적 조화의 본질을 음악에서 찾아내곤 했던 19세기 회화의 미학적 경향을 보여준다. [畵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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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및 이미지 출처

나주리, “20세기 초반기 회화에서의 '바흐 르네상스'”, 『낭만음악』 73 (2006): 123-149.
김환기 <론도> 이미지 출처: https://www.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82582
슈빈트 <교향곡> 이미지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oritz_von_Schwind_-_A_Symphony.JPG
발미에 <푸가> 이미지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Fugue_by_Georges_Valmier,_1920.jpg
뒤샹 <소나타> 이미지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File:Marcel_Duchamp,_1911,_La_sonate_%28Sonata%29,_oil_on_canvas,_145.1_x_113.3_cm,_Philadelphia_Museum_of_Art.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