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에서 작동되는 느리고 슬픈 음악의 미학
이소연 (음악학박사)
음악과 춤의 만남
음악과 춤은 서로 다름과 같음의 속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 ‘다름’은 태생적으로 다르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소리를 매개로 하는 음악은 본질적으로 시간적이며, 몸을 매개로 하는 춤은 본질적으로 공간적이다. 음악의 비트, 박자, 리듬, 선율, 화성 등은 시간 위에 존재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펼쳐지고 발전한다. 반면 춤의 움직임은 물리적인 공간 안에 존재하며 높이, 방향, 위치, 거리 등의 공간적 요소들과 상호작용 하면서 이루어진다. 본질적으로 다른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음악은 듣는 감각, 춤은 보는 감각이 주요하게 관여된다.
그러나 음악과 춤이 결합했을 때 이 둘 사이에서 ‘같음’의 속성은 증가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은 춤에서 음악이 수용되는 범위가 그 반대의 경우보다 더 포괄적이고 직관적이라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음악은 음악에 관한 여러 가지 요소들이 기록되고 읽히는 ‘악보’가 있기 때문에, 춤과 음악이 만나면 춤은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정보를 담고 있는 악보로부터 안무 구성을 위한 많은 정보를 얻게 되며 이를 춤동작에 반영하게 된다. 물론 춤도 안무를 기록할 수 있는 무보가 있다. 20세기에 만들어진 라바노테이션(Labanotation)이나 비니쉬 노테이션(Benesh movement notaion) 같은 것이 있으나 악보처럼 누구나 독해할 수 없다는 어려움 등의 이유로 실제로 활용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춤이 음악을 만나면 춤은 음악을 닮아가게 되고, 둘 사이의 ‘같음’의 속성이 증가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음악과 춤의 아다지오
악보에 있는 여러 정보 가운데 특히 템포는 춤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요소다. 즉 빠른 템포에서는 빠르게 움직이게 되고, 느린 템포에서는 느리게 움직이게 된다. 느리게 연주하라는 음악 용어인 ‘아다지오’(Adagio, Adage)는 발레에서도 통용되는데, 느리게 천천히 움직이라는 뜻으로서 이러한 동작들을 통칭하여 부르기도 한다. 전통적인 발레 수업에서 필수적으로 수행되는 아다지오는 느리게 움직이면서 힘의 조절과 절제의 테크닉을 훈련한다. 아다지오에서는 주로 데벨로페(Développé), 아라베스크(Arabesque), 에티튜드(Attitude)와 같은 동작들을 수행하게 되는데 이 동작들은 모두 한 다리를 지탱하고 다른 쪽 다리를 뻗거나 천천히 들어 올리는 형태이다. 이때 지탱하는 다리가 힘있게 버텨주어야만 흔들리지 않고 정확하게 우아한 동작을 구현할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아다지오는 유연함은 물론 받쳐주고 버텨주며 절제할 수 있는 근육의 힘이 동시에 필요한 것이다. 발레는 어쩌면 돌고 뛰는 빠른 동작보다 느린 동작에서 아름다움이 완성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는 느린 음악과 결합하여 발레 작품을 그 절정으로 이끄는 그랑 파드되(Grand pas de duex)의 아다지오에서 확인할 수 있다[영상 1, 2].
영상 1, 2. 그랑 파드되의 아다지오 동작의 예
그랑 파드되는 클래식 발레 작품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부분으로서, 기교적인 면에서나 표현적인 면에서 작품의 중심을 차지한다. 그랑 파드되는 아다지오-바리에이션(Variations)-코다(Coda)의 순서로 구성된다. 느린 음악에 맞춰 이인무를 추는 아디지오 이후, 남녀 각각의 독무를 바리에이션이라 부르는데 보통 도약과 회전 등의 동작으로 자신의 기교와 기량을 뽐낸다. 마지막 코다는 음악의 코다처럼 그랑 파드되를 종결짓는 부분이다. 일반적으로 아다지오나 바리에이션에 등장했던 특징적인 요소들을 재현하며 빠르고 활기차게 종지한다. 19세기 후반 고전 발레에서 완성된 그랑 파드되의 형식은 그 구성의 이름만 보더라도 음악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아다지오가 첫 번째로 등장하는 것은 전체 작품에서 아다지오의 중요성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아다지오에서 중요한 것은 일차적으로 두 무용수의 파트너십일 테지만 그 완성미의 관건은 음악과의 조화로운 호흡이다.
아다지오에서 음악은 여러 가지 역할을 한다. 우선 움직임이 수행되는 정확한 타이밍을 제시한다. 아다지오 특유의 긴 프레이즈에서 동작을 언제 시작하고 언제 끝내야 할지, 아크로바틱한 기교의 절정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등에 대한 안무적인 고민을 음악의 단위, 음형, 음고, 음량, 강세 등의 음악적 재료로부터 힌트를 얻는다. 두 번째로, 발레에서 가장 감성적이고 표현적이라 할 수 있는 아다지오에서 사랑, 이별, 슬픔 등의 감정이 잘 드러나도록 음악은 이를 섬세하게 보조한다. 음악의 조성, 화성, 선율, 다이내믹 등은 감성을 자극하고 특정한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특히 드라마가 있는 발레에서 음악은 에피소드의 단락을 나누고 장면을 구분하며 특정한 정서에서 다른 정서로 이끄는 ‘드라마투르기적’(dramaturgic) 기능을 하면서 발레의 내러티브를 이끌어가거나 이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청각적으로 뒷받침해준다.
음악의 내적 장치와 춤의 주제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음악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요소들과 움직임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라면 이제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 음악의 내적 특징이 춤과 어떻게 연관성을 맺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우리에게 잘 알려진 피나 바우쉬(Pina Bausch, 1940-2009)의 《카페 뮐러》(Café Müller, 1978)는 탄츠테아터(Tanztheater) 탄생의 서막을 알리는 그의 초기작으로서 피나 바우쉬가 직접 무대에 올라 공연한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다. 《카페 뮐러》는 피나 바우쉬의 어릴 적 기억들을 모티브로 삼아 고독, 방황, 불안, 애증 등의 인간 내면의 감정들을 두서없는 동작의 나열을 통해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 이 가운데 서로 접촉하여 관계 맺기를 끊임없이 욕망하지만 곧이어 좌절하고 실패하는 반복적 움직임이 매우 독특한데, 이 움직임의 시퀀스에 주제가 집약되어 있다고 하겠다[영상 3].
영상 3. 《카페 뮐러》에서 돋보이는 반복적 움직임
《카페 뮐러》의 춤과 음악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춤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음악적 요소들을 시각화하는 것에 중점을 두지 않고, 춤이 은유하고자 하는 것을 음악의 내적 장치와 연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특정한 서사 없이 여러 개의 장면과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나열되는 단편성으로부터 통일된 정서와 분위기 조성을 위해 음악이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사용된 음악은 총 네 곡으로, 모두 헨리 퍼셀(Herny Purcell, 1659-95)의 곡이다. 《요정 여왕》(The Fairy Queen) 중 ‘The Plaint: O Let Me Weep’, 《디도와 에네아스》(Dido and Aeneas) 중 ‘Thy Hand, Belinda ... When I Am Laid In Earth’, 《요정 여왕》 중 ‘Next, Winter Comes Slowly’와 ‘See, Even Night’의 순으로 쓰여지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마지막 곡을 제외한 세 곡에서 모두 ‘라멘토의 엠블렘’이라 불리는 하행 4도 패턴이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라멘토의 엠블렘이란 1640년대 이후 이탈리아에서부터 유행했던, 슬픔을 표현하고자 할 때 관습적으로 쓰인 패턴에 붙여진 명칭이다. 이는 순차적으로 하행하는 4도 음형을 갖는다[악보1].
악보 1. 순차 하행 4도 패턴
라멘토라는 고유한 음악적 정서가 슬프고 우울한 멜랑콜리를 필연적으로 불러온다는 점은 《카페 뮐러》에서 조성하고자 했던 분위기가 무엇인지, 어떠한 정서로 통합하려 했는지에 대한 안무 의도와 음악의 선택 이유에 대한 충분한 답이 될 수 있다.
특히 《디도와 에네아스》 중 디도의 라멘토 ‘When I Am Laid In Earth’는 전형적 라멘토 음형을 다소 변형시킨 형태이다. 단음계로 하행하는 4도를 반음계로 하행시키고 종지를 강화해 패턴화하여 그라운드 베이스(ground bass)로 사용한 것으로서, 이 베이스 패턴이 노래의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되고 있다. 이 패턴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암시하는 음악적 장치로 설명되곤 한다[악보 2]. [영상 4]는 《카페 뮐러》에서 디도의 라멘토가 쓰인 부분이다.
악보 2. 《디도와 에네아스》 중 디도의 라멘토 ‘When I Am Laid In Earth’의 베이스 패턴
영상 4. 《카페 뮐러》에서 디도의 라멘토가 쓰여진 부분
《요정 여왕》의 ‘O Let Me Weep’에서도 디도의 라멘토와 똑같은 형태의 그라운드 베이스가 사용되고 있으며[악보 3], ‘Next, Winter Comes Slowly’에서는 종지가 없는 반음계 하행 패턴이 여러 성부에서 모방되고 있다. 어찌 됐든 간에 위 세 곡 모두 라멘토 엠블렘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카페 뮐러》의 마지막 곡인 ‘See, Even Night’에서는 하행 4도인 라멘토 엠블렘이 사용되고 있지는 않지만 하나의 특정한 음형 패턴이 여러 성부에서 모방되며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특징이 있다. 역시 이 노래에서도 나머지 세 곡과 마찬가지로 '반복'이 중요한 음악적 장치로 쓰이고 있다.
악보 3. 《요정 여왕》 중 ‘O Let Me Weep’의 베이스 패턴
영상 5. 《카페 뮐러》의 티저 영상 《카페 뮐러》의 전체 영상은 피나 바우쉬 재단(www.pinabausch.org)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음악의 이러한 내적 장치는 춤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 《카페 뮐러》에서 욕망과 좌절, 고독과 상실이라는 춤의 주제는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움직임으로 응축, 집약된다. 여기에 더하여, 하나의 패턴이 동일하게 반복되는 여러 음악들이 춤의 주제를 청각적으로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음악들은 모두 같은 작곡가의 곡들이며, 더욱이 라멘토의 감성으로 묶이는 음악들로서 춤에서 일관된 정서를 조성하고, 춤의 주제를 강화하며, 춤의 의미를 형성해 나가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다름 아닌 느리고 슬픈 음악으로서 말이다. [畵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