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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畵/音.zine vol.1] ‘교향곡’ 초기 역사와 변모
안정순 / 2022-02-26 / HIT : 570

‘교향곡’ 초기 역사와 변모

​안정순 (음악학박사)

 

 

   다(多)악장의 관현악곡으로 정의되는 교향곡은 여느 음악장르보다 서양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르이다. 기악음악전체를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크고 장엄하다할 수 있는 교향곡이 만들어진 때는 언제일까? 아마 대부분은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하고 무려 106곡의 교향곡을 다작한 하이든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독일 중심의 음악사 서술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하이든 이전의 교향곡이 조금 낯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실 어떤 장르의 탄생에 정확한 기준과 시점이 존재하기는 힘들다. 장르 탄생의 서사는 주로 주목받지 못했던 부분에서 시작하여, 시대적 요구로 인해 그 부분이 확대되고 확장되어 결국 독립한다는 식의 구조를 갖는다. 예컨대 비슷한 시기 오페라 부파의 탄생을 설명할 때 오페라 세리아 속 분위기 전환용이었던 막간극이 다음 세기를 지배하는 새로운 양식이 되었다고 설명된다. 교향곡의 탄생도 오페라 부파의 탄생에 대한 서사구조와 유사하다. 교향곡은 궁정행사의 시작을 알리거나, 오페라의 전체 분위기를 알려주는, 왁자지껄하던 극장의 분위기를 잡아주던 소위 부수음악이었던 오페라 서곡에서 연주회용 서곡 혹은 연주회용 교향곡으로 독립한 후, 다음 수세기를 지배하는, 어마어마한 집중력으로 청취해야 하는 장르인 교향곡(symphony)이 된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여기서 초기 교향곡 역사의 일부분을 확대시켜보면 교향곡에 대한 재미난 이야깃거리가 있고, 이를 통해 교향곡에 대한 이해를 확장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연주회용 서곡 혹은 연주회용 교향곡

 

   미슬리베체크(Josef Myslivečk: 1737-1781)라는 한 보헤미안 작곡가가 오페라를 쓰기 위해 1781년 밀라노 방문했을 때 우연히 삼마르티니(G. B. Sammartini: 1770-1775)의 교향곡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하이든 양식의 조상을 찾았다!”라고 소리쳤다.

 

   이처럼 18세기에도 하이든의 교향곡이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는지가 큰 관심사였다. 여기  단절된 듯해 보이는 역사적 시기에 삼마르티니가 있다. 앞서 교향곡을 다(多)악장의 관현악곡으로 포괄적으로 정의하였지만, 사실 교향곡을 하나의 통합된 사전적 의미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게 쓰이기 때문이다. 교향곡은 그리스어 ‘sym’(con, 함께)과 ‘phonos’(sonus, 울림)의 합성어로,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의 ‘신포니아’(syn-phonia), 즉 ‘함께 울림’이라는 의미에서 출발하였다. 음악사에서 ‘신포니아’ 혹은 ‘심포니’의 어원에 충실하게 사용한 작곡가는 가브리엘리(Giovanni Gabrieli: 1557-1612)와 쉬츠(Heinrich Schutz: 1585-1672)이다. 17세기 이후가 되자, ‘신포니아’는 오페라, 오라토리오, 칸타타 등의 앞부분에 서곡으로, 아리아 사이의 기악 ‘리토르넬로’로, 기악 앙상블인 ‘소나타’ 혹은 ‘콘체르토’로 다양하게 불리며 사용된다. 이렇게 사용된 ‘서곡’(overture), ‘심포니’(symphony), ‘신포니아’(sinfonia)는 결국 다 같은 의미였다. 심지어 신포니아는 현대의 오케스트라 곡으로 딱 떨어지게 분류되지 않는 소나타, 파르티타, 트리오, 4중주, 5중주 등과도 구분 없이 사용되었다.

 

   교향곡의 전신(前身)의 후보로 오페라 서곡, 오케스트라 모음곡, 리피에노 콘체르토 등이 언급되지만 이중에서 교향곡의 발생을 ‘오페라 서곡’에서 독립하였다고 보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18세기 교향곡은 서곡의 형태로 오페라와 더불어 공연이나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하며, 궁정, 도시, 교회 등의 공공 행사와 연회에 없어서는 안 되는 장르였다. 이때 먼저 언급했던 여러 다른 이름들로 방대한 양의 곡들이 막 쏟아졌다.

 

   방대한 양의 곡들이 쏟아졌다는 것은 방대한 수요의 방증이다. 또한 이러한 방대한 수요는 취향과 미학의 변화를 암시한다. 이제 교향곡은 궁정의 유흥과 같은 부수음악에서 벗어나 연주회장(Concert)음악으로 변모한다. 즉 18세기 신포니아는 궁정의 유흥을 위한 음악이 ‘독립된’, ‘콘서트용’ 교향곡이 되었고, 바로 이 콘서트용 교향곡을 탄생시킨 작곡가가 밀라노에서 활동한 삼마르티니이다. 삼마르티니가 오페라 서곡이 아닌 ‘공공 연주회를 위한 독립된 교향곡’을 처음 쓴 때를 교향곡의 탄생 시기로 보면 1734년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생애동안 약 68개의 교향곡을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이든은 자신의 초기 교향곡이 삼마르티니에 빚졌다는 평가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하이든의 초기 교향곡과 삼마르티니의 교향곡은 아주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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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바니 바티스타 삼마르티니

 

만하임 악파

 

   초기 교향곡들에서는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것 같은 ‘팡파레’와 ‘로켓’ 음형이 흔히 들리는데 이는 만하임 악파의 고유한 특징이다. 교향곡의 역사에서는 만하임 악파의 요한 슈타미츠(Johann Stamitz: 1717-1757)를 빠뜨릴 수 없다. 슈타미츠 교향곡은 이탈리아 연주회용 교향곡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북이탈리아의 롬바르디지역에서 태어난 삼마르티니는 주로 밀라노에서 활동하였다. 밀라노를 주도로 하는 룸바르디주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교향곡에 대한 수요가 많았다. (합스부르크 제국과 교향곡의 수요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년~1714년) 후로 합스부르크 제국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하이델베르크에서 라인의 동쪽에 위치한 만하임에 새로운 수도를 형성 하였다. 아마추어 음악가이기도 하였던 선제후 카를 테오도르(Carl Theodor)가 고용한 61명의 전문 음악가들은 유럽에서 가장 규모 있는 오케스트라였다. 음악역사학자 찰스 버니(Charles Burney)는 이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솔로 연주자와 작곡가들을 두고 전쟁에서의 군대, 특히 ‘장군의 부대’(an army of generals)로 빗대어 설명했다.


  교향곡의 역사적 관점에서 만하임 오케스트라의 수장인 슈타미츠가 이룩한 몇 가지 혁신은 미뉴에트 악장을 끼워 넣어 교향곡을 4악장으로 확대시켰다는 점이다. 4악장 형태의 교향곡이 최초로 사용되었는지 여부가 중요하다기보다 보편적으로 많이 사용했다는 점에 강조점이 찍힌다. 그러나 1760년대가 되어 만하임 악파2세대에는 다시 미뉴에트와 트리오 악장을 없애고 다시 3악장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아무튼 음악 역사는 ‘최초로’ 뿐 아니라 ‘광범위한 영향력’을 의미 있게 평가한다. 슈타미츠는 교향곡을 4악장으로 확립했다는 점 이 외에도, 바로크적 유산인 통주저음을 약화시킨 점, 악기 편성에서 클라리넷과 호른을 도입한 점 등이 언급된다. 무엇보다 오케스트레이션을 잘 활용하여 교향곡의 음향을 효과적으로 만든 점은 만하임 악파의 고유한 특징이다. 당시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인 슈바르트(Christian Friedrich Schubart)는 포르테는 ‘천둥소리’, 크레센도는 ‘폭포’, 디미뉴엔도는 ‘멀리 흘러 사라져가는 맑은 물’, 피아노는 ‘봄의 숨결’로 묘사하였다. 또한 시작하는 부분의 빠르게 올라가는 패시지를 ‘로켓’, 오스티나토 위에 펼쳐지는 크레센도는 ‘증기롤러’ 등으로 묘사하였다. 음원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의 남겨진 음악에 대한 비평은 당시의 소리를 연상할 수 있는 좋은 사료이다.

 

   그럼에도 19세기 교향곡의 입장에서 본다면, 슈타미츠 교향곡은 전개의 연속성과 긴밀함보다 다채로움과 친밀감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디베르티멘토나 오케스트라 세레나데와 더 닮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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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슈타미츠 (그림의 이름 표기 'G'는 '요한'의 이탈리아식 표기인 '조반니'를 뜻한다.) 

 

기악음악의 달라진 위상과 변모

 

   수많은 작곡가들이 교향곡을 작곡했음에도 불구하고, 18세기 교향곡의 발전은 삼마르티니, 슈타미츠, 하이든, 모차르트 순으로 설명하는 게 일반적이다. 현대적 의미의 교향곡은 교향곡의 수요가 오페라 서곡이나 궁정의 행사 알림용이 아닌 공공의 영역인 ‘연주회용 교향곡’이라 할 수 있다. 이제 교향곡은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으로 이어지며 이들의 사회적 입지와 더불어 이를 둘러싼 미학적 관점의 변한다. 양적으로만 보아도 106개라는 다작의 하이든과 고작(?) 9개의 교향곡 작곡가인 베토벤 사이에 또 다른 지층이 형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좀 더 보편적으로 설명한다면, 하이든이 활동한 고전 시기는 교향곡의 탄생과 더불어 기악음악의 위상이 달리진 시기이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기까지만 해도 의미를 전달하는 데 있어서 단연 성악음악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기악음악은 성악음악의 부수적 역할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고전시기에 이르러 기악음악은 더 이상 부수음악 위치가 아닌 성악음악처럼 노래할 수 있고, 심지어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위치로 격상된다. 이는 서양음악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놀라운 미학적 변화이다. 하이든의 교향곡은 기악 작곡 규칙과 규범을 만들고 깨면서 의미를 생성시킨다. 즉 이것은 음악의 자율성을 강조한 ‘순수기악음악’을 의미한다. 기악음악은 이제 성악음악을 대체하며 서양음악의 위대한 문화적 우세가 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순수기악음악’ 혹은 ‘절대음악’이라는 개념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음악가들이 처한 사회적 입지는 이때 급격한 변화를 맞는다. 하이든은 거의 평생을  귀족에게 고용되어 후원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삶을 살았다. 덕분에 안정된 직업을 갖게 된 면도 있다. 하이든과 대조적으로 모차르트는 후원자가 없는 프리랜서의 위치였다. 후원자라는 보호막이 없었던 모차르트는 세상을 향해 최초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작곡가로 평가받는다. 비록 후기 마지막 교향곡을 제외한 교향곡은 행사 목적으로 작곡되었지만, 그의 후기 교향곡은 심리적 드라마로 음악이 자신의 내부를 그리며 영혼에 담긴 변화무쌍한 변화를 담아내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모차르트 후기 교향곡은 20세기의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이후에나 나올 법한 심리학적 용어(psychoanalytical terms)를 사용하여 분석된다는 점은 흥미롭다. 여하간 교향곡은 이제 더 이상 ‘신포니아’로 불릴 수 없는 자율성을 가진 기악음악의 정상에 위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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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 슈토크가 그린 모차르트 (1789년) 

 

   비슷한 시기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하이든과는 달리 불안정한 입지의 프리랜서 모차르트. 스스로 생계를 꾸려야 했던 상황 때문에 모차르트는 오페라에 더욱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루돌프 대공 등과 같은 든든한 후원자를 배경으로 둔 베토벤으로 이어지는 작곡가의 변화된 사회적 입지는 교향곡에 대한 미학적 변화를 야기한다. 교향곡은 후원자의 요구대로, 입맛대로 마구 생산되던 ‘부수음악’에서 ‘순수예술’, ‘순수기악음악’으로 그 위상이 높아졌다. 베토벤의 교향곡은 자기 자신의 한계를 끊임없이 넘어서며 변모한다. 특히 교향곡 6번은 기악음악의 표제적 성격이 드러나는데, 이는 후에 낭만시기의 작곡가들이 주제의 변형과 발전이라는 전통적 양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절대음악’을 선호하는 쪽과 ‘프로그램음악’을 선호하는 쪽으로 양분화 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더욱이 베토벤 마지막 교향곡 9번의 4악장은 기악과 성악의 융합으로 이제 기악음악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위치에 다다른 것으로 평가받는다. 교향곡으로서의 새로움의 끝판왕이자, 음악과 언어의 결합인 새로운 영역에 발을 디딘 순간이었다. 이제 베토벤의 교향곡 9번 이후의 모든 작곡가들은 늘 베토벤과 비교당해야만 했다. 브람스는 거인(베토벤)의 음악 뒤에 서 교향곡을 작곡하는 것에 대한 부담스러움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였고, 바그너는 베토벤 이후의 모든 교향곡은 전혀 새로움을 담아내지 못하는 그저 베토벤의 에필로그일 뿐이라고 평가했다. 교향곡의 탄생과 변모라는 이 모든 변화는 불과 한 세기 안에 이뤄졌다. 베토벤 이후로 펼쳐지는 교향곡의 변모와 이에 대한 수용은 또 다른 흥미로운 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畵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