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고전적 가치와 역사성
안정순 (음악학박사. 음악평론가)
“음악은 역사적이었고, 역사적이고, 역사적일 것이다.”
(Music is historical through and through)
- 테오도르 아도르노
고전 대(對) 역사성
서양음악에서 고전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시대구분의 말로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에 해당되는 고전시기를 지칭하며 이 시기에 활동한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작품을 의미한다. 둘째는 미술, 문학, 음악을 포함한 모든 예술 분야에 적용되는 말로 과거에 만들어졌지만 보편적 아름다움의 기준을 충족하여 시간을 초월하여 인정받은 작품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이 고대 그리스 예술을 설명할 때 고귀한 단순성과 고요한 위대성의 의미로 처음 사용하였다. 그런데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작품들은 영구적인 레퍼토리에 채택되어 끊임없이 연주되고 있으니 두 가지 고전의 의미는 서로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아도르노(Theodore Adorno)가 말한 ‘처음부터 끝까지 역사적인 음악’은 시간에 따른 변화를 전제한다. 그 질적 가치를 인정받아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을 ‘정전’(正典, canon)이라고 한다면, 고전, 다시 말해 정전이 된 작품은 분명 변화를 전제로 하는 음악의 역사성과는 대치된다고 할 수 있다. 음악의 역사성은 이러한 불변의 절대적 가치라기보다는 사회 문화적인 특성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한다는 가변성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은 정전 자체가 아닌 정전의 이면, 즉 정전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포착된다.
정전 만들기: ① 19세기 독일 미학
사실 과거의 음악에 대한 관심과 기록은 19세기적 산물이다. 고전시기의 정점에 위치한 베토벤 이후부터 과거 작곡가와 작품에 대한 기록과 발굴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이때 재발견된 대표적인 작곡가가 바로 바로크 음악의 거장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이다. 그는 독일 바이마르, 쾨텐, 라이프치히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평생 독일을 떠나본 적 없었다. 당시 바흐는 대위법의 대가이자 동시에 오르간 연주자로 유럽에 알려져 있었다. 오히려 바흐와 비슷한 시기 독일에서 활동하고 대중적 양식의 곡을 주로 썼던 텔레만이 바흐보다 훨씬 많은 인기를 누렸고, 바흐의 둘째 아들인 C. P. E. 바흐(Carl Philip Emmanuel Bach)가 18세기 후반까지 아버지보다 휠씬 높은 명성을 누렸다. 당시 사람들이 ‘위대한 바흐’로 부른 이가 J. S. 바흐가 아닌 C. P. E. 바흐였다는 점만 보아도 당시의 유럽 분위기를 예측할 수 있다. 즉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바흐의 모습은 19세기 이후에 형성된 것이다.
18세기까지 전 유럽에 유행했던 음악은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에서 기인한 갈랑(galant)과 감정과다와 같은 스타일이었다. 대위법적이고 학구적 스타일의 곡은 18세기의 입장에서 보면 다소 고리타분하고 유행에 뒤떨어진 음악 양식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바흐 사후 100년 동안 이어졌다. 그러다 19세기가 되자, 포르켈(Johann Nicolaus Forkel)의 바흐 생애 출판과 로베르트 슈만의 1850년 바흐협회 설립, 그리고 멘델스존이 <마태수난곡>의 베를린 공연을 감독하면서 바흐를 공연장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바흐 사후 한 세기가 지나서야 바흐의 음악은 정전으로서 고전의 위치에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19세기 독일 미학은 민족주의적인 이유와 더불어 바흐를 재발견하고 소생시켜 거의 신의 자리, 절대적 지존의 위치에 앉혔다. 그는 ‘음악의 아버지’가 되고 모든 음악은 그로부터 나오게 되었다. 이제 19세기 독일 음악은 바흐로부터 시작하여 하이든 모차르트라는 점을 지나 베토벤까지 이어지는 선으로 연결된다.
명예의 전당: 왼쪽부터 쇼팽, 헨델, 글루크, 슈만, 베버,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 슈베르트, 베토벤(가운데 권좌), 멘델스존, 바그너, 마이어베어, 구노, 베르디, 리스트, 부르크너, 브람스, 그리그
정전 만들기: ②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의 노력
베토벤은 독일 음악의 정점으로 이를 부인하는 이는 없다. 살아생전 베토벤은 당대 많은 귀족들의 든든한 후원 덕분에 예술가로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는 살아생전과 사후의 평가가 비교적 큰 차이가 없는 작곡가이기도 하다. (바흐를 보라. 바흐는 한 세기 이상 잊힌 인물이다.) 그러나 베토벤과 한 시대의 인기를 독차지하던 로시니의 사후 평가는 사뭇 달랐다. 베토벤보다 약 스무 살 정도 어린 로시니는 작곡가로서의 이른 성공과 명성을 누렸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풍족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의 이름과 작품 연주는 베토벤과 달리 그의 사후 쉽게 사라지게 된다. 물론 도니체티나 벨리니 같은 로시니의 뒤를 이은 오페라 작곡가들의 선방도 있었고, 로시니의 오페라를 소화할 만한 실력 있는 가수의 부재가 원인이라는 추측들도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19세기의 지배적인 절대음악을 향한 독일 미학에 의해 도태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1960년대까지 로시니의 작품 중 그나마 레퍼토리로 연주되던 작품은 <세비야의 이발사>와 <기욤 텔>뿐이었다.
로시니가 지금과 같은 어느 정도의 명성, 고전의 위치로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이탈리아 오페라를 연구하던 음악학자, 필립 고세트(Philip Gosset)의 노력 덕분이었다. 1970년대 이후에 다시 이탈리아 오페라가 전 유럽에서 공연되기 시작하였는데 고세트는 이러한 변화를 주도하였다. 그는 이탈리아 오페라 연구의 일환으로 <로시니 작품집>을 편찬하였고, 더불어 벨칸토 스타일의 성악 지도와 오페라 코칭에 팔을 걷어붙였다. 결국 살아생전 엄청난 인기를 누리다가 사후에 사라져버린 로시니와 같은 작곡가를 다시 고전적 반열, 정전의 위치로 불러들일 수 있었던 건 한 사람의 노력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노력만으로 어떤 작품도 고전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정전을 만드는 과정은 항상 긍정적으로 열려있지만은 않다. 흥미로운 점은 한 작곡가, 한 작품에 정전의 가치를 부여하려면 동시에 그 주변에 존재했던 다른 작곡가, 다른 작품을 배제시키는 힘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일단 고전의 반열에 오르고 나면 작품 발굴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던 태도가 아이러니하게도 아직 고전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다른 작품을 향하여 바로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정전 만들기: ③ 음악 소비문화의 변화
정전이 되는 과정은 한 작곡가의 작품 안에서도 다르게 진행된다. 모차르트는 협주곡 장르에서 그 누구보다 탁월한 업적을 남긴 작곡가이다. 그는 협주곡 장르를 통해 여러 계층의 청중에게 즐거움을 주고 동시에 도전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중 K. 452는 <피아노와 목관을 위한 오중주>로 실내 작품의 표준적인 앙상블 규범에서 벗어나 작곡되었다. 이 곡은 작곡가 자신이 평가한 작품에 대한 가치와 실제 수용 과정에서의 복잡한 관계를 잘 보여준다. 1784년 4월 10일 K.452가 초연되자마자 모차르트는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편지를 썼다. 일종의 초연에 대한 보고서였다.
“이 오중주곡은 아주 큰 박수갈채를 받았어요. 저는 이 곡이 내 전 생애에 작곡된 작품 중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 아버지가 이 연주를 함께 들었으면 하고 얼마나 바랐는지 모릅니다. 정말 아름답게 연주되었거든요. 솔직히 저는 연주가 끝날 때 쯤 아주 피곤했어요. 그렇지만 전 확신해요. 청중들은 결코 피곤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날 연주회에서는 K. 452와 함께 피아노 협주곡 K. 450, K.451이 함께 초연되었다고 한다. K. 452는 오보에, 클라리넷, 호른, 바순과 피아노의 악기 구성을 갖는다. 모차르트는 이 작품에 스스로 최고의 찬사를 보내며 자부심을 표현하였다. 그런데 당시 프란츠 2세 시대의 빈의 반응은 그의 생각과 달랐고, 이런 상황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심지어 『모차르트 캠패니언』(Mozart Companion)에 실린 영미음악학계의 거장 한스 켈러(Hans Keller)의 글에도 이 작품은 언급조차 찾아볼 수 없다. 결국 20세기를 통틀어 이 작품에 대한 기록은 『새 음악과 음악가에 대한 그로브 사전』에 쓰인 스탠리 새디(Stanley Sadie)의 언급이 전부이다. 그것조차 장르적 논란에 관한 것이다.
K. 452의 수용에 변화를 맞은 계기로 1990년 중엽에 유행한 ‘음악 레코딩’이라는 수용 환경의 변화를 꼽는다. 그라모폰 클래식 카다로그(1994)를 보면 K.452가 거의 피아노 협주곡 K.451만큼 녹음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한 작품이 영구적인 레퍼토리인 정전이 되는 것은 레코딩이라는 음악의 소비 환경과도 관련됨을 보여준다.
정전 만들기와 역사성
정전을 만드는 과정은 수많은 음악작품 중에서 고전의 가치를 가진 작품을 고르는 일이다. 리디어 고어(Lydia Goehr)의 표현에 따르면, ‘상상의 음악 작품 박물관’에 들어올 작품을 선별하는 것이다. 일단 박물관 속에 들어온 고전음악 작품은 흘러가는 시간을 멈추어 나이를 먹지 않는다. 반면, 작품을 선별하여 정전을 만드는 과정은 그 시대의 지배적인 미학이나 음악 수용의 환경과 같은 수많은 변수들이 겹겹이 작동하는 영역이다. 여기에 역사적인 시간이 작동한다. 그런데 여기서도 흥미로운 점이 있다. 음악 박물관에 일단 들어온 작품은 박물관 밖의 작품에 대해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의 가치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애써 베토벤을 흠집내려하지 않는다.)
정전화의 과정은 아도르노가 말하는 음악이 갖는 역사적인 특성이 작동하는 영역이다. 음악의 역사성은 영원한 레퍼토리라는 닫힌 고전의 개념을 사회 문화적으로 열리게 함으로써 그 형성의 원리를 비판적으로 이해하도록 한다. 그런데 이것이 21세기 달라진 음악 창작과 소비 환경을 마주하는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처음부터 지극히 서양 중심적인 담론으로 출발한 논의에 불편할 수도, 베토벤을 추앙하는 데에 논리적 이유가 불필요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음악의 역사성, 다시 말해 고전적 가치와 정전 형성의 과정을 사회 문화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고전과 정전의 형성 과정에 참여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미 고전담론에서 벗어난 새로운 탈주선을 그리며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畵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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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Cook, Nicholas. 『음악에 관한 몇 가지 생각』(Music: A Very Short Introduction). 장호연 번역. 서울: 곰출판, 2016.
Everist, Mark. “Reception Theories, Canonic Discourses.” In Rethinking Music. Edited by Nicholas Cook and Mark Everist.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Huttunen, Matti. “The Historical Justification of Music.” Philosophy of Music Education Review 16/1 (2008): 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