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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화음 평론상 입상작]공감각적 경험으로의 순례
노지은 / 2024-02-28 / HIT : 205

 

공감각적 경험으로의 순례

화음챔버오케스트라 <미술관 순례Ⅱ> 비평

 

노지은

 

 

 

 

순례의 길, 그 시작

 

순례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의 여정을 강조하는 고요한 시작이다. 그리고 마침내 다다를 목적지는 순례자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곳이다. 즉, 순례자에게는 순례를 위한 목적이 있으며, 그곳에서 무언가 얻고자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을 결심한다. 이는 단순히 걸어서,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혹은 차를 타고 집 근처를 나와 어디론가 떠나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다. 순례자의 길은 때론 멀고 험하며, 떠나는 그 여정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이처럼 어려움과 수고를 감내하더라도 무언가 얻기 위해 떠나는 길, 그것이 순례자의 길이다.

 

이러한 순례의 개념을 “미술관 순례”라는 이름으로 현대예술 세계에 가져온 이들이 바로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이다. 올해로 창단 30주년을 맞이한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화음(畵音)’이라는 자신들의 이름에 담긴 정체성처럼 미술과 음악의 만남을 다양한 프로젝트와 시리즈를 통해 선보였다. 그중에서도 <화음프로젝트 페스티벌>은 미술 작품들로부터 영감을 받은 음악 작품들을 위촉하고 연주함으로써 새로운 예술세계의 지평을 열어왔다. 그러나 지난 2020년 코로나 팬데믹으로 페스티벌이 무산되면서 그 이듬해부터 갤러리에서 전시되고 연주되었던 미술 작품과 음악 작품을 다시 음악무대로 가져오는 <미술관 순례> 시리즈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날 <미술관 순례Ⅱ>에서는 홍대 ‘대안공간 루프’에서 전시되었던 작품들이 다섯 개의 음악작품과 함께 예술의 전당 인춘아트홀 무대에 올려졌다. 대안공간 루프는 1999년 홍대 지역에서 출발한 한국 최초의 대안공간이다. 이곳이 추구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의 확대와 대안적 삶의 철학과 미학을 시민들과 함께 구축하는 것이라 한다. 이러한 맥락 속에 대안공간 루프에서는 동시대 이슈들을 자신만의 미감으로 구축한 실험적인 예술가들의 현대예술 작품들을 주로 전시해 왔다. 바로 이 공간이 젊음의 거리 홍대에서 예술의전당이라는 음악 연주홀로, 화음챔버오케스트라와 함께 ‘순례’라는 이름을 걸고 온 것이다.

 

미술관과 음악회장, 서로 다른 두 공간은 각각의 예술 형태에 대한 독특한 경험을 제공한다. 미술관에서는 미술작품을, 음악회장에서는 음악작품을 만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회장에서 이루어지는 미술관 순례는 특별하고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미술관 순례는 어쩌면 이 두 공간의 경계를 흐리며 새로운 예술적 경험을 탐구하는 시도일지도 모른다. 이 시도는 과연 음악회장에서 어떠한 경험을 일으킬지 기대와 의문을 품고 순례의 여정 그 시작점에 섰다.

 

무대 위 복제된 예술

 

대안공간 루프에 전시되었던 미술작품들은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무대 위의 스크린을 통해 비추어진다. 스크린은 소규모 공연장 특성상 크지 않고 선명하지 않았다. 음악과 함께 비추어진 작품들 중 시각예술인 회화작품과 사진예술은 스크린에 멈춰있어도 나름 호소력 있게 다가왔다. 반면 설치미술이나 실험적인 예술작품들은 미술관이라는 공간 없이 부분적으로 촬영된 모습들로 나타나 어떤 작품인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무대 위에서 실제로 연주되는 음악과는 달리 미술관의 작품들은 스크린에 복제된 모습으로 음악보다 다소 거리감을 주었다.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에 대해 언급한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예술 작품이 기술적으로 복제 가능한 시대에서 예술작품의 아우라는 점점 힘을 잃는다고 한다. 가장 완벽한 복제에서도 한 가지만은 빠져있는데, 그것은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으로써, 곧 예술작품이 있는 장소에서 그것이 갖는 일회적인 현존재라고 한다. 쉽게 말해 예술작품이 존재하는 물리적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흔적은 복제된 것에서 찾을 수 없으며, 이는 원작이 있는 장소에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복제된 작품은 원작이 도달할 수 없는 상황에 원작의 모사(模寫)를 가져다 놓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음악회장 무대 위 스크린에 비추어진 미술작품은 원작의 아우라는 없을지 몰라도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바로 눈앞에 펼쳐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관 순례에서의 미술작품들은 비록 스크린 속의 복제된 작품들이지만, 미술관이 아닌 음악회장에서 경험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예술현장에서 복제된 예술은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하며 대중들에게 말을 걸고 있다. 미술관에서는 고흐나 클림트 같은 화가들의 그림을 더 이상 애써 원본으로 들이지 않는다. 다만 복제된 그들의 작품을 ‘미디어 아트’라는 이름하에 전시함으로써 대중들이 작품을 공감각적으로 느끼고 경험하도록 하는데 힘을 기울인다. 이러한 예술현장에서는 원본을 보기 위한 순례의 여정도 필요하지 않게 된다. 단지 그것을 공감각적으로 보고 듣고 경험함으로써 사유하는 경험을 누리면 되는 것이다.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맥루한은 미디어의 발달과 융합으로 현대사회는 공감각의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그의 이론에 비추어 볼 때, 화음프로젝트와 같은 시도는 현대 매체의 발달과 그에 따른 새로운 예술적 의미를 탐구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이 공연은 전통적인 예술형태를 넘어서 다양한 매체를 융합하는 현대예술의 특성을 반영한다. 이러한 접근은 예술작품이 단순히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관객과 상호작용하는 공감각적 경험의 일부가 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그렇기에 화음프로젝트의 미술관 순례에서 복제된 예술작품은 복제예술이라는 한계를 넘어 무대 위 음악과 함께 공감각적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무대 위 실연(實演)되는 예술

 

미술관 순례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음악회장의 ‘무대’라는 것에 다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물리적 공간은 그 안에 있는 존재를 정의하며, 그 존재의 정체성은 그것이 존재하는 공간을 정의하기도 한다. 음악회장의 무대는 음악이 있는 공간이며, 음악은 음악을 펼치기에 최적화된 무대에서 비로소 빛을 발한다. 대안공간 루프의 미술작품이 루프라는 공간에서 더 의미를 갖고 그 공간이 주는 공간감과 함께 빛을 발했던 것처럼 말이다. 미술관 순례가 이루어진 예술의전당 인춘아트홀은 예술의전당에서 가장 작은 홀임에도 무대와 조명, 좌석배치, 온도와 습도 등을 모두 ‘음악’을 위한 공간으로 역할하도록 신경 쓴 것이 느껴졌다.

 

이 무대라는 공간을 고려하여 자신의 음악적 아이디어를 공간 위에 효과적으로 그려낸 작곡가들이 있다. 전다빈은 음악의 주제가 된 ‘에코챔버’라는 용어의 원의미인 인공적인 소리의 잔향감을 가지는 ‘공간’에 착안하여 무대 위 음악으로 또 다른 공간을 창조했다. 그는 ‘넓은 공간’을 연주자와 관객들이 포함된 공간으로 정의함으로써 관객도 그 공간의 일원으로 포함시켰다. ‘좁은 공간’인 피아노의 인사이드 공간에서 반향 되어 울리는 목관악기의 소리는 관객이 포함된 넓은 공간을 향해 울려 퍼졌고, 무대 위 음악만으로 공감각적 경험을 가능케 했다.

 

서지웅 역시 연주홀의 모든 조명을 끄고 자신의 작품을 ‘완전한 어둠 속에서’ 연주하도록 지시하여 오로지 소리에 집중하도록 이끌었다. 이는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어두운 공간과 불협화를 이루는 음들 속에서 마침내 화성적 울림을 주는 ‘악흥의 순간’을 발견하는 음악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음악 자체로 무대 위에서 공감각적 경험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다만 이 작품들에서 대안공간 루프라는 공간과 미술작품들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다. 애써 연관 지을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저 두 작곡가의 음악을 음미하는 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무대라는 공간너머에는 작곡가가 경험한 미술관이 있다. 대안공간 루프에서 전시되었던 작품들 중 특별히 작곡가에게 영감을 준 작품들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작곡가 김성기는 김신영의 회화작품 <위안에 관한 실외>를 음악으로 표현했다. 그림 속 형체, 색, 선 등은 바이올린 독주곡에서 음악적 주제로 형상화되었고, 작곡가의 시각적 경험은 청중에게 청각적 경험으로 전달되었다. 바이올린 독주인 만큼 연주자의 기량이 돋보였으며, 연주자는 스크린 속의 그림을 설명해 주듯 때론 날카롭게, 때론 부드럽게 활로 음들을 그어나갔다.

 

작곡가 유진선은 백정기의 작품 <내장산>에 영감을 받아 음악을 만들었다. 내장산의 모습을 자연 그대로 재현해 내고자 실제 잎사귀 색으로 잉크를 추출하여 프린트한 사진작품은 작곡가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그 역시 내장산에서 들리는 자연의 소리들을 녹음하여 음악 속에 담아냈다. 스크린 속의 <내장산>은 선명하지 않았음에도 연주자들의 생생한 연주와 녹음된 자연의 소리를 통해 점점 입체적으로 다가왔다. 스크린 속의 작품 속에서 자연의 소리가 들리고, 음악을 통해 내장산의 색깔들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미술과 음악이 ‘자연’이라는 또 다른 공간을 무대 위에 불러낸 것이다.

 

마지막으로 연주된 이만방의 첼로 독주곡은 이호인의 그림 <Untitled>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우리 옛 가곡에 바탕을 두어 작곡된 음악과 함께 스크린에 펼쳐진 푸른 바다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외딴섬의 모습은 마치 처음부터 서로를 위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림 속에서 음악이 들리고, 음악에서 그림이 보였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 낯익으면서도 낯선 선율을 노래하는 첼로의 울림은 끝내 몇몇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연주자는 그림과 음악 속에서 자신 나름의 해석을 가지고 호소력 있는 연주를 보여주었고, 이는 미술관 순례의 끝을 깊은 울림으로 남게 했다.

 

순례의 길 끝에서


‘순례’란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방문하여 참배하는 것, 혹은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방문하는 비유적으로 의미한다. 직접 방문하지 않는 순례를 표방한 이번 공연에서 직접 가보지 않은 낯선 공간을 향한 순례자의 길 끝에 다다르기는 쉽지 않았다. 그저 순례자의 길, 그 출발점에 서서 몇 걸음 떼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는 직접 방문하지 않는 순례에서 오는 아우라의 부재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관 순례는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긴 여정 중 하나의 여정처럼 다가왔다. 지난 30여 년간 화음은 그림과 음악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예술세계를 구축하며 묵묵히 이 길을 걸어왔다.

 

이날 경험한 <미술관 순례Ⅱ>에서 미술과 음악은 무대 위에서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며 관객들에게 새로운 감각적 경험의 문을 열었다. 음악회장에서 기대하는 음악을 ‘감상하는’ 경험을 넘어 무대 위에 재현된 미술관의 작품들은 음악과 함께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게 함으로써 ‘공감각적’ 경험을 가능하게 했다. 두 예술작품은 서로의 정체성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조화를 이루기도 하며 미술관과 음악회장을 넘어선 또 다른 세계로 인도하기도 했다. 이는 일반 대중들에게 다소 난해할 수 있는 현대예술의 세계를 공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럼에도 음악회장이라는 음악을 위한 공간에서 진행된 미술관 순례는 몇 가지 한계점을 보였다. 먼저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스크린에 투영된 미술작품은 무대 위에서 실시간으로 연주되는 음악보다 호소력이 부족했다. 원작이 갖는 아우라까지는 아니어도 작품의 색상과 디테일은 어느 정도 살릴 수 있어야했다. 그러나 기술적 한계 때문인지 스크린에 비친 작품은 안개속 작품처럼 흐릿했고, 작품이 있던 대안공간 루프의 공간감 역시 느끼기 어려웠다. 이를 위해서 기술적으로 보완하여 스크린 속의 작품에 대한 시각적 표현을 강화하고 가시성을 개선할 필요성을 느꼈다. 나아가 미술관이라는 공간을 간접적으로나마 순례할 수 있게 공간을 시각화하는 작업이 필요해 보였다. 예를 들면 공간 속에 전시된 작품을 보여주는 시각적 연출 등을 통해 관객은 스크린 속의 미술관을 보다 입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미술관 순례를 위해 무대 위 미술작품은 스크린에서, 음악작품은 연주자의 연주로 연출되는 것은 음악회장에서 이룰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다. 그럼에도 미술과 음악을 균형 있게 다루는 방식에 있어 조금 더 보완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특히 미술작품 없이 특정 주제나 아이디어를 통해 선보인 음악작품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 공연이 미술관 순례를 위한 것이라면 이 작품이 연주되는 동안에도 미술은 나름의 연결성을 갖고 존재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꼭 스크린에 비추지 않아도 미술관이나 작품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 보였다. 이를 통해 관객은 각각의 예술작품과 더 깊이 상호작용 함으로써 예술작품과의 경험을 더 심층적으로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올해로 30주년을 맞이한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미술과 음악의 만남을 통해 예술의 경계를 확장하고 새로운 예술적 경험을 제공하는 순례의 여정을 걸어왔다. 이 여정 속에 예술가, 작품, 관객은 함께 호흡하고 소통하며, 상호작용하며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현대예술 체험의 새로운 방향과 도전을 제시하며, 공감각적 감상으로 시대적 감각을 일깨우는 역할을 해왔다. 순례자가 단순히 순례의 길을 결심하지 않는 것처럼 이 시대의 새로운 예술세계의 지평을 열고자 하는 화음의 순례는 특별한 여정임에 틀림없다. 그렇기에 이 여정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다만 나아가야 할 목적과 방향이 분명하다면 이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물으며 더 나은 길을 모색해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