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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화음 평론상 입상작] 공연에, 음악에, 그리고 예술에 새겨진 이름, 화음(畵音)
안정순 / 2022-12-30 / HIT : 237

공연에, 음악에, 그리고 예술에 새겨진 이름, 화음(畵音)

: 제43회 정기연주회 비평

 

 

안정순

 

 

이름이 나를 만든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도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우리는 모두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의미 없는 이름은 없다. 우리는 이름에 중요하고 소중한 의미를 안고 산다. 이름에 새겨진 부모님의 바람을 이루며 살고자 노력하기도 한다. 이렇듯 한 인물의 정체성은 그 사람의 이름에 녹아있다. 

 

2019년 11월 이후 약 2년 반 만에 제43회 화음(畵音)의 정기연주회가 2022년 5월 6일 예술의 전당 IBK홀에서 있었다. 이번 정기연주회의 제목은 ‘음악에 새겨진 이름’이다. 작곡가들이 자신의 음악 작품에 새겨놓은 이름들, 음악과 함께 계속 불릴 그 이름의 의미를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가운데 연주가 시작되었다. 

 

현악오케스트라 버전인 바흐의 <푸가의 예술>(Die Kunst der Fuge, BWV 1080)의 마지막 곡인 푸가 14번은 저음부의 현에서 D단조로 묵직하면서 비장함이 감도는 주제로 시작하였다. 비장함 속에서 철저하게 계산된 성부 사이의 조화와 균형이 돋보였다. 그러한 균형감 안에서 펼쳐지는 서정성은 바흐의 무궁무진한 대위법 작곡기교가 기술을 넘어 예술임을 천명한다. 더불어 화음챔버의 안정되고 숙련된 연주는 노장 바흐의 노련함을 예술로 승화시키기에 충분했다. 비올라에서 푸가의 세 번째 주제로 등장하는 BACH(B♭, A, C, B)의 선율이 들렸을 때 연주의 끝이 다가옴을 직감함에도, 막상 음악이 중단되자 어김없이 당혹스러웠다. 얼어붙어버린 연주자와 중단된 음악은 멈춰버린 시간을 떠오르게 하며 자연스럽게 인간의 죽음에 대한 여러 생각으로 이어지게 했다. 

 

유진선의 <Mi-in-Do>(화음 프로젝트 Op. 124)는 올해 당선된 것은 아니지만 이번 정기연주회와 부합되는 주제를 포함하는 곡이다. 먼저 저음부에서부터 G를 들려준 후, 제1바이올린에서 G-C-E를 들려주며 시작되었다. 자연배음을 활용한 몇 개의 음들과 그 위로 펼쳐지는 선율이 드러내는 것은 바로 단순함, 깨끗함, 순수함이다. 그러나 음들이 단순할수록 연주자에게는 그 음들을 향한 더 많은 집중력이 요구된다. 더욱이 현악5중주이던 원곡을 현악오케스트라로 확대하여 연주한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연주 호흡의 근사한 차이로 인해 깨끗함과 순수함이 조금 희석된 것 같아 아쉬웠다. 그럼에도 여러 겹의 소리가 어우러지는 후반부에는 훨씬 더 다채로운 소리를 내며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인터미션 후 이어진 곡은 베르크의 <서정모음곡>(Three Pieces from Lyric Suite, 1928) 6악장 중 현악오케스트라 버전으로 발췌, 편곡, 재발행한 세 악장이다. 첫 번째 악장은 조용한 분위기에서 느리게 시작하다가 밝고 경쾌한 리듬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이어진 악장에서는 흩뿌려진 음들 속에 작곡가가 숨겨놓은 자신의 이름과 사랑하는 연인의 이름이 재잘거리며 대화하는 듯했다. 작곡가가 작품에 숨겨놓은 비밀스런 서사를 비록 알지 못하더라도, 별도의 프로그램 없이 순수한 음들의 나열인 기악음악만으로도 오롯이 노련한 연주를 통해 충분히 격렬한 감정, 슬픔, 극적 충만함이 표현되었다. 이는 곧 문자, 음악작품, 연주가 갖는 미스터리한 관계에 대해 궁금증을 유발시켰다. 

  

마지막 곡은 그간 화음의 정기연주회에 빠진 적이 없는 쇼스타코비치 시리즈 중 <현악사중주 5번, in B♭Major, Op. 92 >(1952)의 실내교향곡 버전(안성민 편곡)이다. 작곡가 스스로도 ‘현악심포니’로 명명했을 정도로 현악4중주가 담아내는 소리의 스펙트럼은 교향곡에 비견되었다. 경쾌한 시작과 함께 비올라는 명확히 쇼스타코비치의 독일식 이름의 네 글자 D, S(Es=E♭), C, H(B)를 포함하는 다섯 음을 연주했다. 바이올린이 거칠게 진행하는 가운데에도, 아름다운 주제 선율 뒤에도, 어김없이 들리는 이 동일한 음들은 혼란한 정치와 사회 속에서 쇼스타코비치가 얼마나 치열하고 집요하게 버텨왔는지를 청중에게 고스란히 전달하였다. 1악장과 가는 실로 연결된 듯 시작하는 2악장에서는 전체적으로 절제된 호흡이 돋보였다. 그리고 마지막 악장에서 죽은 듯 느리고 여리게(‘morendo’) 연주하는 부분은 그의 치열했던 삶 덕분인지 고통보다는 안식으로 다가왔다. 작곡가의 드라마틱한 삶을 담아내듯 현악4중주가 표현하는 다채로운 내면의 서사에 감동이 밀려왔다.

 

연주가 끝나자 지휘자, 청중 구분할 거 없이 모두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성공적으로 재개된 연주회에 대한 만족감과 흡족함이 배여 있는 웃음이었다. 이어진 커튼콜에 대한 화답으로 쇼스타코비치의 <다양한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음곡 중 왈츠2>가 앙코르 곡으로 연주되었다. 여러 모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과거에 대한 아련함과 향수를 불러오는 왈츠 특유의 정서. 베일 것 같이 날카롭게 온 신경을 세우고 살았을 것 같은 쇼스타코비치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여러 이데올로기로 얼룩진 20세기를 살았던 쇼스타코비치와 여러 가치가 충돌하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공연장 속의 수많은 쇼스타코비치들에게 뭉클한 위로를 선사한 연주였다.

 

 

음악에 새겨진 이름

 

이번 정기연주회의 공식적인 주제는 ‘음악에 새겨진 이름’이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사용되었던 ‘소제토 카바토’(Soggetto cavato)는 자를리노(Gioseffo Zarlino, 1517-1590)의 이론서에도 등장하는 일종의 작곡기법이다. 이것은 계명창법을 통해 문자와 소리를 연결하여 만든 음악암호로써, 르네상스 시대에는 주로 후원자의 이름을 담은 정선율로, 그 이후로는 여러 작곡가들이 주로 자신의 이름을 하나의 모티프로 음악에 새겨 넣었다. 화음챔버는 음악 속에 새겨진 작곡가의 이름을 변치 않는 예술의 가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였지만, 그 목적, 사용범위, 의미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역사적 배경에 따라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 

 

바흐의 <푸가의 예술>은 작품의 목적, 악장들의 순서, 연주악기군, 심지어 작품의 미완성 여부조차도 명확하지 않은 곡이다. 이번 정기연주회에서 화음챔버는 가장 많이 연주되는 방식인 미완성인 채로 중단되는 원본을 택하였다.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숭고한 음악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 예술가 바흐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극적이기 때문이다. 화음챔버는 이러한 바흐의 모습을 시대를 뛰어넘어 자신의 음악을 순수 예술로 승격시킨 당돌한 예술가 바흐의 이미지로 재해석하였다. 

 

물론 <푸가의 예술>은 바흐가 대위법의 기술을 총망라한 곡으로, 단순히 연습곡으로 치부되기에는 대위법의 기교, 기법, 기술을 한껏 끌어올려 예술의 경지를 보여줌은 자명하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을 새긴 음악을 미완성으로 남기고, 죽음을 맞이한 바흐의 모습에 혹여 예술가의 모습을 과장되게 덧입힌 것은 아닌지 조금은 의문이 든다. 대중에게 알려진 바와 달리, 바흐를 연구하는 볼프(Christoph Wolff)와 같은 학자들은 바흐 작품을 연대기 순으로 놓고 보거나 작곡방식의 일관성 등을 비추어 볼 때 <푸가의 예술>이 다른 후기의 작품들과 비교하여 작곡양식에 많은 차이가 있는 점을 지적하며 바흐의 마지막 곡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BACH(B♭A, C, B)의 이름은 음정간격이 반음계로 대위법을 연습하기에 좋은 음소재로 이미 그 전에도 다른 곡에서 자주 사용되었고, 작곡논리가 비교적 단순한 이 곡을 미완성으로 남겨둘 이유가 없다는 것을 그 근거로 든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과학적 사실이라기보다 해석차원의 문제이다. 그래서 좀 더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해석을 찾는 수밖에 없긴 하다. 그럼에도 그의 음악 속에 새겨진 이름의 의미가 다소 부풀려진 것은 아닌지, 그가 살아온 역사적 배경을 초월하여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일지는 고민해 봄직하다.

 

알반 베르크의 <서정모음곡>은 20세기 초 암호화된 음악기호의 진화를 보여준다. 문학과 음악이 특히 친밀했던 19세기와 세기말의 분위기를 넘어 작곡가는 이 음악암호를 한 차원 높게 성장시킨다. 베르크는 자신과 연인의 첫 글자를 음악작품 속에 넣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이를 캐릭터화하여 음악의 내적 논리에 거대한 비밀스런 열애 서사를 담아내고 있다. 열병과 같이 스쳐지나간 사랑의 황홀함과 애절함이 담아 내러이팅하는 음악. 이 음악에는 기악음악의 모호성과 추상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베르크의 특성이 잘 드러난다. 비록 작곡가의 비밀스런 개인사를 알지 못하더라도 기악음악으로 전하는 극적 분위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차원의 소제토 카바토 기법인 것이다. 특히 B, F, A, B♭ 중 F-B 음정은 20세기 초 빈에서 선호했던 증4도 관계로 비슷한 시기 작곡된 베르크의 대표작 오페라 <보체크>에도 끝없는 기다림과 비극을 의미하는 음으로 사용된 베르크만의 트레이드마크이다. 

 

현대음악에서는 음렬 등을 활용하여 음악에 이름을 새겨 넣는 방식이 더 자유롭게 발전한다. “길지 않은 인생에 인내와 숙련을 담고 있겠다.”라는 유진선 작곡가의 시구에는 찰나의 시간과 대비되는 예술의 영원한 순수함을 담고 있다. 2013년 화음프로젝트 당선작인 유진선의 <Mi-In-Do>는 단순히 글자와 음악의 이분법적 관계에 머물러있지 않다. 그림, 언어, 소리, 음악을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유희하는 해학이 있다. 유진선의 <Mi-In-Do>와 신윤복의 ‘미인도’(美人圖)는 여러 언어와 함께 계명창법으로 부른 음이름의 관계와 이중적으로 얽혀 있어 훨씬 더 다층적이고 흥미롭다. 뿐만 아니라 ‘In’은 도 ‘안에 포함된’ 미로 우연히도 음악의 자연배음과도 연동된다. 작곡가는 이러한 자연배음의 의미를 신윤복의 <미인도>에서 한 여인이 품은 속마음으로, 덕스러운 여인, 한 집안을 지키며 살아온 누이, 아내, 어머니의 모습으로 해석하였다. 그림 속 순수하고 깨끗한 여인의 이미지를 자연배음의 투명한 소리로 표현하였다. 비록 이번 정기연주회에서 초연된 창작곡은 아니지만, 유진선의 <Mi-In-Do>는 그림, 시, 언어, 소리, 음악과 같은 다양한 예술 장르를 넘나들고 고전의 레퍼토리와 섞이며 융화되어 전체 공연의 기획 의도를 더욱 명확하게 했다. 

 

공연을 통해 반복적으로 ‘음악의 사회성’ 환기

 

이번 정기연주회의 제목은 음악에 새겨진 이름이지만, ‘음악의 사회성’이라는 암묵적 주제를 포함하고 있다. 음악과 사회의 관계는 밀접하다. 동시에 음악과 사회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고 복합적이다. 그 관계를 일차원적으로 바라보면 자칫 예술의 가치가 폄하되고, 다각적으로 보려다보면 예술은 방관자의 모습이 되기도 한다. 쇼스타코비치가 베토벤 사중주단을 위해 현악4중주 5번을 작곡하던 때에는 형식주의자에 대한 비판이 극에 달했을 때이다. 그럼에도 비판의 표적이 되기 쉬운 현악4중주는 쇼스타코비치가 어느 누구보다 어떤 장르보다 심혈을 기울인 장르였다.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의 저자인 앤더슨(M. T. Anderson)은 형식주의자라는 이름으로 쇼스타코비치에게 이루어진 공격을 이렇게 묘사한다.

 

어떨 때는 지나치게 단순하다고, 어떨 때는 지나치게 복잡하다고 했다. 지나치게 가볍고 사소하다는 비판, 지나치게 감성적이라는 비판, 지나치게 감정이 메마르다는 비판도 형식주의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대중적 곡조를 포함하면 포함했다고, 대중의 음악을 무시하면 무시했다고, 위대한 작곡가들의 옛 방식을 저버리면 저버렸다고, 혁명 전 과거 대가들의 방식을 계승하면 계승했다고 공격받았다. 수십 년 뒤에 스탈린이 죽기 직전에 누군가 그에게 형식주의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정말 무엇인지 물었다고 한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렇게 대답했다. “악마만이 알겠지.” 【...】 예술가가 무엇을 하든 상관없이 누구도 안전하지 않았다. 

 

이런 사회 속에서 작곡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주여, 우리에게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쇼스타코비치는 평온을 비는 기도로 알려진 이 기도문을 자기 책상머리에 두었다고 한다. 급변하는 국제정치 속 다양한 정치권력과 공생할 수밖에 없었던 쇼스타코비치. 그는 어쩌면 처세술에 능한 자인지도 모르겠다. 1979년 미국에서 출간된 쇼스타고비치의 회고록 『증언』 조차도 위조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타루스킨(Richard Taruskin, 1945-2022)을 포함한 여러 음악역사학자들은 그의 삶에 대한 기록도 그가 남긴 회고록조차도 진실만을 담았다는 보장은 없다고 주장한다. 결국 우리는 진실이 없는 역사에 진실을 묻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큰 힘이 있다는 것에 대부분 동의한다. 이는 그의 음악에 거대한 사회구조와 여러 이해관계 속에서 음악과 예술을 향한 집요한 인간의 정신이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공연(performance)이라는 용어는 수행, 반복, 지속의 의미를 이미 내포하고 있으며, 화음챔버의 매 정기연주회는 음악공연이라는 행위를 통해 ‘음악과 사회’, ‘예술과 윤리’라는 묵직한 주제를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환기하고 있다. 반복된 공연을 통해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에서 우리가 듣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이다.

 

공연문화에 새겨진 이름, 화음(畵音)의 의미

 

작곡가들이 음악에 새겨 넣은 이름들은 시대와 역사적 상황에 따라 그 목적과 의미가 달라진다. 후대에 발견되지 않았다면 굳이 회자되지 않고 잊혔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이름은 누군가가 기억해주고 불러주었을 때 그 의미가 만들어진다. 김춘수 시인의 시처럼 누군가에게 꽃이 되려면 이름이 있다는 사실보다 불러주는 사람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  

 

음악도, 음악 속에 새겨진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공연을 통해, 연주를 통해, 동시대이든 다른 시대이든 들려지는 순간 의미가 발생한다. 이 시대에 공연을 통해 음악의 의미를 소환하는 화음의 역할이 더욱 중요한 이유이다. 

 

이제 내년이면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창단 30주년을 맞는다. 인간의 생애주기로 보면 장년인 셈이다. 그동안 화음은 화음프로젝트라는 이름하에 그림을 주제로 창작음악을 위촉하고, 렉처, 고전레퍼토리와 같은 여러 형태로 기획된 음악회와 학생들을 위한 교육의 목적을 담은 그림책 음악회, 청소년 음악회 등 다양한 형태의 공연으로 쉼 없이 달려왔다. 척박한 한국의 창작음악 환경에서 200개가 훨씬 웃도는 창작음악콘텐츠는 다른 형태의 음악회와 페스티벌로 파생되며 화음의 활동 반경을 확장시켰다. 

 

화음챔버는 이번 정기연주회를 통해 ‘음악의 사회성’과 같은 묵직한 주제를 리토르넬로 방식으로 매 정기연주회마다 반복하여 전달하고, 동시에 ‘음악에 새겨진 이름’과 같은 새로운 에피소드도 선보였다. 고전레퍼토리와의 결합함으로써 고전과 현대를 아우르는 프로그램은 화음의 경쟁력이다. 창작음악의 척박한 환경에서 이뤄낸 그림, 음악, 글이 균형을 맞춘 예술 활동은 화음이 여느 연주 단체와 차별화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음악에 새겨진 이름이 시간을 두고 그 의미가 완성되어가듯, 화음(畵音)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어쩌면 이 시대에 완성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화음(畵音)이 시간을 두고 사회와 끊임없는 관계의 충돌을 통해 지속적으로 재의미화가 되며 미래로 나아갈 것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