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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음악의 다양한 모습
박상연 / 2008-12-08 / HIT : 1306

예술과 종교가 우리의 역사속에서 어떤 모습인지는 그 영향력 만큼이나 극과 극을 포함합니다. 종교의 믿음(신념)과 사상이 나와 우리라는 틀안에 갇칠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술은 인간사의 거창한 담론에서 부터 사소한 이해관계까지 어떤 경계도 없고 종교에서 요구하는 도덕적 책무 조차 무색하게 하며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음에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니 사회에서는 여러 형태의 모습으로 투영됩니다. 

이제 소개 할 음악과 정치 권력이 만났었던 때의 한 이야기는 그 중 일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다양한 시각의 필요성과 그를 표현함에 있어 품위와 진지함이 있으니 어떤 정치적 오해도 없을 듯 합니다.

박상연 / 화음 쳄버 오케스트라, 화음 프로젝트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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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비가 내리는 날, 도쿄도 내의 영화관까지 베를린 필(베를린 필하모니 교향악단) 영화를 보러 갔다. 베를린 필 연주를 난생 처음 들은 것은 10년 정도 전 베를린을 여행했을 때다. 베를린 필은 카라얀이 수석지휘자였던 시절부터 몇번인가 일본에 와서 연주를 했으나 내게는 티켓 값이 너무 비쌌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내가 몇번인가 베를린에 갔지만 일정이 잘 맞지 않아 실제로 연주를 들을 기회가 없었다. 1990년대 중반을 지나 마침내 그 기회가 왔다. 연주 곡목은 라두 루푸가 독주를 한 브람스의 피아노협주곡, 그리고 역시 브람스의 교향곡 제1번. 지휘는 클라우디오 아바도였다. 그날 밤의 감개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 연주회에 함께 갔던 아내는 걸어서 호텔에 돌아오면서 “지금 이대로 죽어버렸으면”하고 말했다. 그토록 감격한 아내의 기분을 나도 같이 느꼈다. 지금도 나와 아내는 가끔 그날 밤을 떠올리고는 살아오면서 들은 연주 가운데 최고로 꼽곤 한다.

그 뒤 베를린 필 수석지휘자는 아바도에서 사이먼 래틀로 교체됐다. 지휘자가 래틀로 바뀌고 나서 나는 자주 베를린 필을 들었다. 2007년 봄 잘츠부르크에서 들은 바그너의 악극 <라인의 황금>은 상당히 좋았다. 하지만 아바도 지휘 시대를 능가하는 명연주는 유감스럽게도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 래틀이 이끄는 베를린 필이 2005년 가을 베이징, 서울, 상하이, 홍콩, 타이베이, 도쿄를 돌면서 한 아시아 투어 연주를 촬영한 다큐멘터리가 이번에 내가 보러간 영화 <베를린 필-최고의 하모니를 찾아서>(원제: TRIP TO ASIA-The Quest For Harmony)다. 흥미 깊었던 것은 출신도 나이도 천차만별인 악단원들을 인터뷰한 것이었다. 솔리스트로서도 유명한 오보에 주자 알브레히트 마이어는 예상 외로 신경질적인 맨얼굴을 보여주었다. 베네수엘라의 슬럼가에서 기적처럼 나타나 최연소로 정식 악단원이 된 콘트라베이스 주자 에딕슨 루이스는 “사람은 태어나 성장하고 살아가면서 발전한다. 그게 인생이라는 것이다”라고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했다. 노령의 파곳 주자 헤닝 트로크는 “‘신이여, 지금 죽음을’, 그런 순간을 몇번이나 맛볼 수 있는 광영을 누릴 수 있었으니, 인생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했다. 필시 아내가 “지금 이대로 죽어버렸으면”이라고 한 그날 밤과 같은 순간을 얘기하는 것이리라. 이 영화는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불리는 베를린 필을 구성하는 연주자 개개인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 음악이라는 예술이 지닌 불가사의한 힘의 비밀을 찾아간다.

“지휘자는 왔다 간다. 그래도 베를린 필은 남는다”라는 말이 영화 속에 나온다. 사이먼 래틀은 그 말을 받아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계속하는 게 내 책임이다”라고 말했다. 베를린 필의 125년 역사를 짊어진 사람다운 고지식한 발언이다.

실은 이 영화가 끝난 뒤 밤 9시부터 또 한 편의 영화가 더 상영됐다. <제국 오케스트라>(원제: Das Reichsorcheter)다. 이 다큐멘터리 작품은 “과거를 검증하고 이해한다”는 취지로 2007년 베를린 필 125주년 기념식전에서 상영됐다. 원래 베를린 필은 정치권력이나 권위에 대한 독립정신을 지닌 독립기업이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패배와 바이마르공화국 시대의 혼란을 거쳐 재정파탄에 직면했다. 1933년에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정권을 탈취하자 선전장관 괴벨스는 베를린 필에 재정지원을 하기로 결정했고 예술감독이었던 푸르트벵글러는 악단 존속을 위해서라며 이 지원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베를린 필은 제3제국의 어용 오케스트라가 됐고 나치스의 프로파간다(선전)에 가담하게 된다. 1933년 당시 베를린 필에는 4명의 유대인 단원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악단에서 추방돼 외국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 한편으로 베를린 필 단원들에게는 많은 특권이 주어졌다. 그들에겐 높은 급여와 훌륭한 악기들이 주어졌고 국내에서 구하기 어려운 기호품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저 격렬한 전쟁 중에도 병역을 면제받았다.

이 영화 감독은 당시 단원들에겐 “이 파란의 시대에 눈을 감는 일”, 그리고 “추방당한 4명의 음악가들 존재에 눈을 감는 일”이 “얼마나 손쉬웠던가”를 묘사했다고 말했다. 추방당한 4명의 유대인 단원들 중 한 사람은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 당도했으나 그곳을 점령한 독일의 동맹국 일본에 의해 강제수용소에 수감당했다. 그는 전쟁 뒤에도 오래 살았으나 두 번 다시 독일에 돌아가지 않고 일본의 외진 시골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당시의 기억을 아직 살아있는 두명의 전 악단원들이 증언한다. 그들은 영화 속에서 “베를린 필이 나치의 오케스트라였던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생각은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 이 영화에는 히틀러의 탄생일 축하연주회에서 베를린 필을 배경으로 연설하는 괴벨스의 모습과 그 괴벨스와 정중하게 악수하는 푸르트벵글러의 모습을 비춘 귀중한 영상도 나온다.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이 줄지어 앉은 나치 고관들 앞에서 소리 높게 연주되는 영상을 보면, 이 작품을 단지 우애의 찬가로만 칭송하는 것은 깊은 죄를 짓는 순진함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뛰어난 예술은 “지금 이대로 죽어버렸으면”하고 생각할 정도의 지복(至福)을 우리에게 준다. 그와 동시에 대부분의 예술가는 “예술이라는 지고(至高)의 가치를 위해서”라는 생각으로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국가나 자본의 범죄에 가담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술이 지닌 양면성이다. 이 두 편의 영화를 이어서 볼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이 두렵기까지 한 양면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얻었으니 말이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는 말이 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연주되는 교향곡 9번은 어떨까? 현재의 연주자와 청중이 나치시대의 전철을 밟고 있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파란의 시대’나 ‘추방당한 자들의 존재’에 눈을 감고 그것을 ‘예술’이란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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