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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레퍼토리 프로젝트 Story Ⅱ: Literature] 음악 서사의 풍요로움
김인겸 / 2023-06-01 / HIT : 427

화음챔버오케스트라 레퍼토리 프로젝트 Story Ⅱ: Literature(문학)

음악 서사의 풍요로움

김인겸(음악평론가)

 

화음챔버오케스트라, 박상연(지휘)

2023년 5월 20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1. 비평을 위한 서문 : ‘낭만시대와 개인 서사의 장기지속성’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치, 경제, 사회, 사상과 문화는 변한다. 역사가는 이 변화의 흐름을 추적하여 의미 있는 변곡점에서 다음 변곡점 사이의 구간을 ‘시대’라 하고 그 시대를 전 시대 및 후 시대와 구별하는 작업을 한다. ‘문학’을 주제로 한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2023년 두 번째 레퍼토리 프로젝트를 비평하는 관문에서 필자는 낭만시대를 규명해보고자 한다. 이번에 무대에 오른 세 작품 모두 직・간접적으로 낭만시대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다지만, 때로 의미 있는 가정은 인물이나 시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음악사를 공부하면서도 “만약 모차르트(W. A. Mozart, 1756-1791)가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서양음악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와 같은 재미있는 가정을 종종 만난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가정은 어떨까? “만약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패배하지 않고 유럽을 계속 지배했다면 음악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이 정치사적 가정을 음악사적 가정으로 연결시켜 보자.  “그랬다면 슈베르트(F. P. Schubert, 1797-1828)는 우리가 익히 아는 그런 음악을 썼을까?”

 

  물론 “알 수 없다”가 정답에 가깝겠으나 논의를 이어가기 위해 방향을 설정해보자. 프랑스혁명은 단순히 폭동이 일어나서 왕을 죽이고 정치권력이 교체된 사건이 아니다. 구시대에 왕과 귀족, 성직자가 독점하던 자유와 권리는 프랑스혁명을 기점으로 시민에게 확대되었다. 물론 당시 시민은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 시민보다는 축소된, 재산을 보유하거나 전문지식을 가진 부르주아 계급에 가깝다. 어쨌든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혁명의 정신은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고, 이에 따라 계몽주의에 기반 한 진보적 믿음이 지식인, 예술가를 중심으로 퍼졌다. 베토벤(L. v. Beethoven, 1770-1827)이 고전주의의 완성자이자 낭만주의의 개척자라는 타이틀을 동시에 갖는 것도 이러한 시대상과 무관하지 않다. 모차르트가 10년만 더 살았으면 서양음악이 다르게 전개되었을 수 있다는 상상도 당시의 시대에 대한 이해를 근거로 한다. 

 

  혁명은 반동(反動)을 낳는다. 나폴레옹은 유배지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1821년에 죽었지만, 그는 1814년에 사실상 정치적으로 사망선고를 받고 엘바 섬으로 쫓겨났다. 워털루 전투(1815)는 대세와는 무관했다. 실제로 1814년부터 1815년에 나폴레옹 전쟁의 전후 처리를 위해 빈 회의가 열렸고 이후 30여 년 동안 지속된 유럽의 정치체제를 ‘빈 체제’라 부른다. 빈 체제는 간단히 말해 프랑스혁명 전으로 세상을 되돌리는 보수적 왕정복고 체제였고, 이에 따라 각국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는 억압되었다. 

 

  1797년생인 슈베르트는 빈 체제 성립 당시 십대 후반이었고 빈 체제가 강고하던 1828년에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가정을 하자. 만약 슈베르트가 7월 혁명이 일어나던 1830년을 넘어 빈 체제가 사실상 종말을 고하는 2월 혁명과 3월 혁명이 일어난 1848년을 지나 60세 정도까지 살아서 활동했다면 그의 작품세계 또한 다른 국면으로 전개되지 않았을까? 

 

  다시 19세기 초로 돌아가면 유럽 각국 정부는 검열을 강화하고 비밀경찰을 풀어 불온한 움직임을 사전 포착하여 탄압했다. 이제 예술가들은 개인의 내면과 자아(주로 감정과 열정)의 표현에 집중했다. 현실을 떠나 과거와 신화와 꿈, 죽음, 초자연적인 것, 비합리적인 존재로 도피했다. 19세기는 과학기술이 발전한 시대였고, 이에 따라 악기의 개량으로 음악적 표현수단이 확장되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 한 면이 있다. 그러니까 낭만주의 시대의 작곡가들은 어떤 면에서 의고적인 태도를 가지면서도 이를 표현하는 수단이라는 관점에서 첨단 테크놀로지의 수혜를 입은 측면이 있다. 또한 낭만주의 시대의 작곡가들은 자신의 자아와 감정을 음악작품으로 표현했는데, 이는 개인의 서사라는 관점에서 파악할 수도 있다. 

 

  문학평론가 김윤식(1936-2018)의 서문 인용으로 우리나라에서 더욱 유명해진 루카치(G. Lukacs, 1885-1971)는 『소설의 이론』(1916)에서 부르주아의 서사양식으로서의 장편소설이 근대 자본주의를 설명한다고 주장한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 신과 영웅이 활약한 서사시라는 장르는 19세기 들어 장편소설이라는 장르에 문학의 주인공 자리를 내어주었다. 우리는 창을 꼬나 쥐고 풍차로 돌진하는 돈키호테 대신 빚과 불륜 끝에 자살하는 마담 보바리를 만난다. 도술을 쓰는 홍길동 대신 고향에 가서 과거의 자신을 닮은 여자를 만나 번민하는 윤희중을 김승옥(1941-)의 단편 「무진기행」에서 읽는다. 

 

  20세기 이후 문학에서도 많은 다양한 실험적 시도가 있어왔고 인터넷 등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따른 변화도 커 보인다. 그러나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도처에 존재하는 개인의 서사라는 19세기적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힘들다고 거칠게 뭉뚱그려 요약하고 싶다. 즉 19세기 문학은 개인의 서사이며 동시에 개인에 관한 서사이다. ‘개인의 서사’는 창작자가 위대한 예술가일 수 있으나 그렇더라도 ‘일개 개인’이라는 점도 엄염한 현실이라는 뜻이다. 한편 ‘개인에 관한 서사’도 작품 속 인물이 혹 영웅일 수도 있으나 그렇더라도 동시에 ‘일개 개인’인 것을 의미한다. 김훈(1948-)은 장편소설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을 생로병사를 겪으며 내적 고뇌로 잠 못 이루는 인간으로 그려내었으며 독자들은 그러한 이순신에 공감하였다. 물론 그 결과로 이순신이 영웅이 아니게 된 것은 아니었다.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 장석진의 <카프카 : 1권>, 그리고 쇤베르크(A. Schönberg, 1874-1951)의 <정화된 밤>은 작곡가 개인의 서사이자 그 시대에 존재하거나 존재할 법한 개인(혹은 개인들)에 관한 서사로 이해하고 싶다. 문학에서 서사의 원천을 찾을 수 있는 이 음악작품들은 음악을 풀어나가는 서사양식의 측면에서는 작곡가가 몸담았던 당대와 작곡가 개인의 개성을 함께 반영한다. 

 

 

2-1. 비평 : 음악과 문학, ‘죽음과 변화들’

 

  낭만주의 시대에 죽음은 매혹적인 소재였다. 신의 심판이자 지옥이라는 죽음에 대한 중세적 인식이 여전히 남아 있었으나 그조차도 낭만적으로 윤색되었다. 현실이 부정적이면 부정적일수록, 긍정적이라도 현실에서 도피하여 새로운 이상적 세계에 도달하고자 욕망하는 것이 낭만시대의 과제였으며 이때 죽음은 두렵긴 해도 상상의 나래를 펴기에 적합한 개념이었다.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의 시에서 소녀는 죽음을 거부하지만, 의인화된 인격체로 표현된 죽음은 자신을 친구로 소개하며 “벌을 주러 온 것이 아니”니 죽음의 “품 안에서 편안히 잠들리라”고 노래한다. 역사학자 아리에스(P. Ariès, 1914-1984)는 『죽음의 역사』에서 “죽음은 집을 떠나 병원으로 갔다. 이제 죽음은 일상의 친숙한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인은 충분히, 그리고 가까이서 죽음을 보지 못함으로써 죽음을 망각했다.”고 썼다. 우리는 살기 위해 병원에 가지만 결과적으로는 죽으려고 병원에 간다. 병원은 장례식장 영업을 함께 한다. 어쩌면 요즘 각광을 받는 호스피스와 연명치료 거부 등은 죽음에서조차 소외된 현대인의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도라는 생각도 든다.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가 마냥 우울하지 않으며 작품 후반으로 갈수록 환희로 넘치는 것 또한 죽음이 내포한 다양한 의미를 음악에 담아낸 듯하다. 이번 연주회에서는 4악장에서 슈베르트의 <마왕>에 등장하는 마왕의 달콤한 속삭임이 필자에게 환청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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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2023) 신은주

(종이에 수채와 연필 Watercolor and graphite pencil on Paper, 210x145mm)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소설 『데미안』 (헤르만 헤세 作)의 한 구절처럼 진정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죽음'이라는 테마의 슈베르트 곡을 통해 죽음이 단지 끝이 아니라 기존의 낡은 것을 벗어던지고 또 다른 새로운 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음을 표현하고자 했다.(신은주의 작품노트)

 

  변신은 문학뿐만 아니라 신화의 오랜 모티프였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까지 올라가면 너무 길어지니 카프카(F. Kafka, 1883-1924)의 『변신』에 초점을 맞추자. 물론 작곡가 장석진은 카프카의 소설과 자신의 작품과의 직접적 연결성을 경계하고 있으나 필자 나름의 해석을 덧붙이고자 한다. 소설 『변신』에서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했다가 죽은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변신 전에 회사원이었다. 작품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벌레로의 변신보다 그레고르의 가족들의 변화이다. 아니다, 그냥 변신이라고 하자. 그레고르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돈을 버는 사람으로서 부모님의 장남이자 하나뿐인 여동생의 오빠이다. 부모님은 무기력하게 집에서 소일거리를 하며 시간을 보냈고 여동생도 음대 진학을 지망하는 백수이다. 그들은 가장이 벌레로 변해 더 이상 돈을 못 벌게 되자 처음에는 그레고르를 걱정하고 동정하며 돌봤으나 그가 사람으로 되돌아와 다시 돈을 벌 가능성이 절대로 없다는 확신에 다다랐을 때 냉정하게 아들, 오빠를 버린다. 심지어 분노에 찬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아 그레고르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이는 죽음의 직접적 원인이 된다. 그토록 무기력하고 무능력해 보였던 부모님과 여동생은 구직을 해 일을 시작하였고 일을 시작하며 자신감을 찾았으며 마지막에는 그 집을 처분하고 새 삶을 찾아 떠난다. 이 작품은 가족이라는 공동체조차 허구일 수 있으며 거창하게 자본주의까지 갈 것도 없는, 어쩌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착취를 고발한다. 가족이 이럴진대 타인은 어떻겠는가? 

 

  『변신』에서 그레고르가 왜 벌레로 변신했는지는 알 수 없다. 작품은 그의 변신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선언과도 같은 유명한 설정은 인간의 실존적 불안과 고독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필자는 카프카의 건조한 문체와 거리를 두는 듯한 냉정한 묘사와 서사를 장석진이 <카프카 : 1권>에서 첼로의 선율과 바이올린 선율의 간극, 저음악기의 규칙적인 고동, 다소 뜬금없는 중음역의 지속음, 큰 틀에서의 순환구조 등을 활용하여 음악적으로 재창조했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 그레고르의 여동생 그레테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장석진 작품에서 들리는 바이올린 소리가 그래서 더 섬뜩하게 들렸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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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변신(2023) 신은주

(종이에 수채와 연필 Watercolor and graphite pencil on Paper, 210x145mm)

"다 잃어봐야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어" 

영화 '파이트 클럽(데이빗 핀처 감독)'에서 잭은 억압받는 삶을 살아가며 자유로운 영혼인 또 다른 자아 타일러를 만들어낸다. 음악을 감상하며 영화 속 자유를 향한 잭의 끈질긴 사투가 함께 연상됐다.(신은주의 작품노트)

 

  <정화된 밤>에서의 ‘정화’는 ‘변모’, ‘변화’와 가까운 의미이니 이 곡도 변신 모티프를 활용한 작품이다. 작품이 모티프로 삼고 있는 리햐르트 데멜의 시를 살펴보면 밤이 정화되는 게 아니라 다른 남자의 아이를 밴 여자, 또는 그 아이가 정화의 대상 혹은 주체로 보인다. 이 대목은 마리아와 예수를 비튼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작곡 당시 빈 악우협회가 쇤베르크의 초연 의뢰를 거절하며 내세운 이유가 단순히 화성이나 데멜 시의 도덕적・성적 타락 부분이 아니라 신성모독적 요소가 있는 작품이라고 해석한 것은 아닐까 추정한다. 

 

  <정화된 밤>은 음시(音詩), 또는 교향시로 번역되는 ‘tone poem’으로 프로그램뮤직이다. 음시는 낭만주의의 산물답게 개인 내면의 서사나 감정, 심리, 서정 등을 음악으로 표현한 음악형식이다. 이 작품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쇤베르크는 데멜의 시를 음악으로 정화하여 언어로 된 문학을 음으로 된 음악으로 변모시키되, 음악과 문학의 교집합이라는 공간을 ‘음시’라는 형식으로 재창조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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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2023) 신은주

(종이에 수채, 아크릴, 연필 Watercolor, acrylic paint, and graphite pencil on Paper, 210x145mm)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소설 『설국』(가와바타 야스나리作)'의 첫 문장처럼 긴 터널을 빠져나가면 어떤 세상이 펼쳐져 있을까 상상해보곤 한다. 곡을 통해 아름다운 빛을 볼 수 있었고, 특히 어두운 터널 속 저 멀리 길을 안내하는 빛을 표현해보고 싶었다.(신은주의 작품노트)

 

 

2-2. 비평 : 실내오케스트라의 서사와 음향, ‘증폭 혹은 감쇄’

 

  결국 음악은 소리로 들린다. 예외적으로 소음이 사용되는 때를 제외하면 음악의 음향은 악음(樂音)이다. 소리굽쇠에서 나는 음은 순음으로 배음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귀에는 다소 불쾌하게 들릴 수 있다. 따라서 음악의 주음인 악음의 배음이 얼마나 풍성한가, 공명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에 따라 연주 수준이 결정된다. 문제는 연주자가 음향학적 계산을 해서 음을 만들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좋은 연주를 결정하는 요인은 매우 많지만, 작품에 대한 설득력 있는 해석이 확보되었다고 전제할 때 실내오케스트라의 경우 음량과 음색의 조합을 어떻게 시시각각 해석에 걸맞도록 변모시켜 나갈 것인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으로 볼 때 해석과 소리를 동시에 결정해야 하는 지휘자의 어깨가 매우 무겁다.

 

  챔버오케스트라의 원형이자 뼈대라 할 수 있는 현악4중주의 경우 지휘자 없이 각 파트를 맡은 개인의 사전 해석과 이를 바탕으로 한 교감과 앙상블로 음악을 연주하기에 챔버오케스트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순하다. 교향악단의 경우 지휘자의 해석이 전제된다는 점에서는 실내오케스트라와 동일하지만, 음색이 뚜렷한 관악기와 타악기의 가세, 더 많은 연주자로 인해 특정한 음색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은 현악 파트의 특성 때문에 교향악단에서 지휘자의 재량에 의해 음색이 완전히 바뀌기는 쉽지 않다. 달리 말해 전체적인 음색 자체는 작곡가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는 편이다. 

 

  말러(G. Mahler, 1860-1911)가 편곡한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를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제1바이올린, 제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 순서로 각각 6명, 5명, 4명, 3명, 2명씩 총 20명의 연주자가 연주했다. 이 숫자가 소리를 만들기에는 애매해서 참 어렵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귀에 1악장은 조금 정돈이 덜 된 것처럼 들렸다. 관점에 따라 이 거칢은 의도된 거칢이었을 수 있다. 1악장 자체가 죽음에의 유혹을 완강히 거부하는 투쟁이라면 그렇다는 것이다. <죽음과 소녀>는 2악장에서부터 고조되어 3악장, 4악장에 이르러 엄청난 증폭을 보여주었다. 현악4중주에서 결코 들을 수 없는 압도적인 음향덕분에 낭만주의 시대의 저 내성적인 청년 슈베르트가 자신의 들끓는 내면을 우리에게 정직하게 보여준 것만 같다. 

 

  꽉 들어차 있는 게 언제나 좋은 것만은 아니다. 지휘를 맡은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예술감독 박상연은 비움과 덜어냄의 미학을 구현하여 장석진의 <카프카 : 1권>을 노련하게 연주했다. 물론 화음챔버오케스트라 단원들도 활의 압력을 적절히 조정하여 소리를 부풀릴 때와 선으로 뽑아낼 때를 구별했다. 장석진의 작품은 연주자 각자 만들어내는 둥근 소리가 공명하는 부분보다 선처럼 뽑혀 나오는 소리 가닥들이 땋듯이 합쳐지고, 때로는 엉키고, 때로는 평행하게 진행하는 부분들이 더 많다. 따라서 이러한 부분에서 억지로 소리를 증폭시키기보다는 다소 소음적인 음색으로 사운드 감쇄를 시켜야 작품이 더 생생해지는데,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이를 정확히 연주했다. 

 

  쇤베르크의 <정화된 밤>을 감상하던 당시에 필자는 솔직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금 이 글을 쓰기 위해 녹음된 음원을 들으며 당시 느낀 놀라움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스스로 비평가로서의 자부심도 느낀다. 놀라움의 정체는 현악을 전공하는 학생이라면 그날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정화된 밤> 연주를 꼭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훌륭한 연주였다는 사실이다. 실증적으로는 활쓰기와 비브라토 등에서 배울 점이 많았다. 해석, 템포, 앙상블, 음색, 음량, 다이내믹, 루바토 등 모든 요소에서 흠잡을 데 없는 음악이 펼쳐졌으며 그 자체가 단순히 연주자 개개인이 내는 소리의 군집이 아닌, 혼연일체가 된 하나의 오케스트라가 내는 증폭된 사운드가 바로 이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지휘자 박상연의 작품 해석과 그 메신저 역할을 충실히 한 지휘봉이 섬광처럼 번득였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집중력은 시종일관 팽팽하게 유지되었다. 그 모든 것의 총체적 결과물인 완성된 음악적 서사만이 줄 수 있는 감동과 풍요로움을 선사받은 연주였다. [畵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