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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레퍼토리 프로젝트 Inspiration with PaintingsⅠ: Serioso] 묻힐 수 없는 생명력
서주원 / 2022-12-27 / HIT : 296

화음챔버오케스트라 레퍼토리 프로젝트

 

묻힐 수 없는 생명력

서주원(음악비평가, 음악학박사)

 

화음챔버오케스트라, 박상연(지휘)

2022년 12월 19일 서소문성지박물관 콘솔레이션홀

 

묻힐 수 없는 생명력

 

비평을 하다 가장 행복한 순간은 쓰던 펜을 잠잠히 내려놓을 때다. 앙코르곡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 울게 하소서가 울릴 때 숨을 죽였다. 더할 수 없이 간곡하고 충일했다. 덧붙일 말이 없었다. 마지막 감동으로 이어진 음악적 설득력은 연주회 첫 음에서부터 시작됐다. 첫 곡은 베토벤의 현악사중주 11<세리오소>였다. 베토벤이 청각 장애로 소리의 세계에서 차단된 후 심연으로 들어가는 시기의 음악이다. 첫 활에서부터 벼리고 벼린 서늘함이 전해졌다.

 

연주 장소는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이었다. 특이하게도 지하로 깊이 파내려간 구조다. 지상은 한적한 공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칼바람이 부는 넓은 터에 어둠이 서둘러 내려앉았다. 박물관을 찾아 공원을 몇 번이나 맴돌았다. 간신히 찾은 박물관은 헤매던 발아래 있었다. 입구에서 땅으로 내려가는 길이 자연스레 무덤을 연상하게 했다.

 

박물관의 터는 조선 시대의 공식 참형지다. 많은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역사적 공간을 지키고 순교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2019년에 성지 역사박물관으로 개관했다. 연주 장소는 박물관의 가장 깊숙한 지하3층에 있었다. 콘솔레이션 홀, 즉 위안을 주는 장소라고 이름 붙은 공간이다. 원래 연주홀이 아닌 추모홀이다. 다섯 명의 순교자 유해 위에 낮고 넓은 단이 있었고, 그 무덤이 곧 무대가 되었다. 무대를 삼면으로 둘러서 관객석이 형성됐다. 홀 정면 전체 벽에 그림과 영상을 비추었는데 마치 거대한 벽화처럼 보였다.

 

 

비장하게, 거침없이

 

연주곡 <세리오소>의 배경화로 쓰인 그림은 외젠 루이 라미의 음악회의 청중들이었다. 베토벤 음악에 심취해있는 감상자들을 그린 모습은 연주회장의 분위기를 한층 진지하게 만들었다. ‘세리오소는 베토벤이 초고에 썼던 이름이다. ‘비장하게라는 의미를 지닌 이 명칭을 출판 때는 삭제했지만,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지배하며 3악장 지시어로 쓰였다. 이번 연주에서는 현악사중주를 말러가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해 편곡한 버전을 사용해 풍성한 울림과 묵직한 무게감이 더해졌다.

 

작품은 단도직입적으로 시작한다. 모든 연주자가 한 선율로 연주하는데, 화음챔버는 그야말로 혼자 칼 한 자루를 들고 적진으로 곧장 쳐들어가듯결연했다. 예측할 수 없는 조성의 변화와 갑작스러운 셈여림의 대조가 살아 한시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게 했다. 지휘자와 합체된 화음챔버의 활 끝에서 작품의 추진력과 역동성이 강하게 꿈틀거렸다.

 

 

지하의 지하에서

 

임지선의 <그림자의 그림자>에서도 무대 연출과 화음챔버의 연주력으로 작품이 가진 생명력이 새롭게 살아났다. <그림자의 그림자>는 송주호의 작품해설처럼 “‘이라는 반어적인 의미일 수도 있고, 그림자의 더 짙은 그림자를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곡은 조각가 이재효의 작품인 나무의 여러 단면을 모아 구의 형태로 만든 조각품 ‘0121-1110=108021’에서 영감 받아 작곡했다. 음악과 조각 모두 제목에서부터 다층적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그림자의 그림자>는 이전에도 몇 번 연주됐지만 이번 공연에서 작품이 가진 심층적 의미가 극대화됐다. 작곡가는 죽은 나무등걸에서 생명의 소리를듣는 것을 떠올렸다. 댕강 베어진 나무의 밑동에는 생명의 흔적인 삶의 경계가 확장된 시간이 켜켜이 새겨져있다. 이 작품에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의 선율이 인용됐다. 창작 과정에서 임지선은 <세혜라자데>의 이야기가 떠올랐다고 한다. 우연한 영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칼끝이 목을 겨누고 있을 때 이어가는 이야기는 삶과 죽음이 오가는 사투다. 연주와 함께 나온 영상에서는 조각품에서 파생된 이미지들이 변화무쌍하게 움직였다. 음악의 율동감과 영상의 입체감으로 적막과 죽음이 층층이 깔린 지하의 지하에 생기가 돌았다.

 

 

심연에서 영원으로

 

후반부는 그라나도스의 오페라 <고예스카스> 중 간주곡이 고야의 그림을 배경으로 처연하게 연주된 후에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이 연주됐다. 독특한 색채감으로 가득한 <전람회의 그림>은 일종의 추모곡으로, 콘솔레이션 홀에서의 연주는 각별한 감흥을 주었다. 무소륵스키는 화가 하르트만과 깊은 우정을 나누었는데, 하르트만이 39세의 나이로 요절하며 큰 충격에 빠졌다. 하르트만의 추모 전시회에 다녀온 후에 전시장에서 받은 인상을 프롬나드와 함께 10개의 곡에 담아내며 무소륵스키는 음악으로 친구를 기렸다. 산책을 의미하는 프롬나드는 처음에 제시된 후, 작품 사이에서 4번에 걸쳐 등장하며 걷는 중 심경의 변화를 묘사했다. 애도의 마음에서 출발한 음악은 거대한 성문에 도달하며 숭고함에 이른다.

 

원곡은 피아노 작품인데, 라벨의 관현악을 위한 편곡도 원곡 이상 유명하다. 이번 연주에서는 로버트 G. 패터슨의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편곡을 사용했다. 특유의 타건과 질감이 살아있는 피아노 독주곡도 아니고, 관악기와 타악기가 총동원된 화려하고 웅장한 관현악곡도 아니기에 감상에 앞서 약간 우려했다. 무엇보다 관현악 편곡만큼의 연주효과가 있을 것인가에 우려였다. 작품의 클라이맥스를 구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관악기와 타악기가 부재하는데서 발생하게 될 빈 공간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가 문제였다. 그러나 이날 화음챔버의 연주는 이 같은 기우를 낱낱이 깨뜨렸다.

 

오래되고 익숙한 작품이 화음챔버의 손에서 순식간에 현대적이고 세련된 작품으로 변모했다. 현악 오케스트라에서만 가능한 날카롭고도 윤택한 사운드가 홀을 가득 채웠다. 기대 이상의 효과였다. 마치 신들린 듯 박상연 지휘자와 화음챔버는 음표 이상의 것을 연주했다. 숙달된 연주자들이 하나가 되어 내면에서부터 최대치를 끌어낼 때 태도에 장엄함이 서린다. 그 정신과 기운이 청중에게 전달되며 소리를 넘는 충족감을 주는 것이다.

 

무대에는 칸딘스키가 <전람회의 그림>을 위해 만든 무대 세트를 토대로 한 펠릭스 클레의 영상을 비추었다. 거장 예술가들의 감각은 세월이 지나도 낡지 않고 새로운 빛을 발했다. 공간의 의미, 연주의 힘, 연출의 효과가 완벽한 합을 이루며 화음챔버는 이날 공연에서 거대한 예술적 기념비를 세웠다. 죽은 이들이 산 자들을 불러 모으고, 산 자들은 죽음의 공간에 생명을 불어 넣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이 모든 것은 예술적 유산으로 고스란히 남는다. 미술과 음악의 결합에서 탄생한 화음챔버의 고유의 역사는 이렇게 계속된다.[畵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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