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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2020 화음 프로젝트 아카데미 실험 : Documentary Nostalgia] 예술은 인간의 작업이다
서주원 / 2021-03-30 / HIT : 142

 

 

 

예술은 인간의 작업이다

 

 

 

 

예술은 인간이 만든 창작물이다. 그런데 어떤 예술은 이 당연한 사실을 간혹 잊게 만든다. 마치 인간 이상의 존재가 만든 것처럼 말이다. 영미 문학의 대표작 J. D.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의 탄생 배경을 다룬 영화 호밀밭의 반항아에서 한 문학교수는 수업시간에 이렇게 말한다. “이야기보다 성스러운 것은 없다. 성경, 코란, 토라... 그 안의 이야기들은 너무나 강력해서 사람들이 실제로 신이 쓴 거라고 믿는다. 그것이 바로 이야기가 가지는 힘이다.” 이렇게 이야기가 강력한 작품들은 스스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이 이야기에 영상이 더해지면 감동은 배가 된다. 루 윌리스가 쓴 소설 벤허, 그리스도 이야기를 영화 벤허로 만든 감독 윌리엄 와일러가 영화를 완성한 후에 신이시여, 제가 정녕 이 영화를 만들었단 말입니까?”라며 감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극적 완결성을 갖는 완성품 앞에서는 창작의 주체조차 작품을 만든 과정을 잠시 잊게 되나보다. 소설과 영화뿐이겠는가. 음악은 신의 개입이 가장 많은 분야이기도 하다. ‘천상의 음악’, ’하늘이 내린 신동과 같은 수식어는 모차르트 앞에 흔히 붙고, 바흐는 악보 서두에 J.J.(예수여 도우소서)와 말미에 S.D.G.(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이라는 약자를 적어 넣었다.

 

벤허와 모차르트, 바흐의 음악이 보여주는 것은 편집과정을 거친 완전무결함이다. 영화와 음악의 창조자들이 하는 작업 중 많은 과정은 사람이 만든 흔적을 지워가는 것이다. 그러한 인간의 손길에는 때때로 신의 숨결이 덧입혀진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화음프로젝트 Op.212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는 정확히 이 정반대의 과정을 보여준다.

 

 

 

 

 

84분짜리 롱테이크 무성필름

 

정연두 작가의 2007년작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는 비현실적 환상을 주는 모든 것을 의도적으로 역행한다. 제목부터 모순적이다. 실제로 있는 사건을 사실적으로 담은 영상물이라는 다큐멘터리와 추상적인 정서인 노스탤지어(향수)가 결합한 것이다. 이 작품은 비현실적인 노스탤지어가 현실적인 다큐멘터리의 주제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부터 던지게 한다. 또한 정교한 편집기술로 이야기의 이음매, 장면의 전환 과정을 없애 이야기를 이어가는 효과는 여기에 없다. 사실 구체적인 이야기조차 없다. 84분이라는 긴 시간동안 아버지의 집, 약국 거리, 시골 농촌, 대관령의 목장, , 산 정상의 6개의 풍경이 차례로 바뀌는 과정이 이어질 뿐이다. 빈틈을 가리는 것이 편집이라면 이곳에서는 틈 자체가 하나의 틀이 된다.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는다. 대상이 움직일 뿐이다. 등장인물, 건물, 배경이 카메라 앞에서 바뀌는 모든 과정이 카메라에 담긴다. 극적 몰입을 강화시키는 음악 역시 없다. 배경의 교체와 소품의 설치에 따르는 소리조차 소거했다. 모든 것이 낯선 이 풍경 앞에서 관객들은 의자에 앉아 길을 잃는다.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봐야할지 생각하기 시작한다. 영상 외에 주어진 것은 노스탤지어, 즉 향수라는 단서 하나다.

 

화음프로젝트 Op.212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

 

화음챔버오케스트라와 작곡가 장석진이 함께 한 2021년 작 화음프로젝트 Op.212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이하 화음프로젝트 Op.212로 약칭)는 원작품에 작곡과 연주라는 두 작업이 더해졌다. 영화상영관이 아니라 클래식 연주 무대에 영상, 연주자들, 작곡가가 한 무대에 올랐다. 기존의 작품이 이미 완결된 작품이라는 것을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분명한 것은 음악이 들어간 화음프로젝트 Op.212’는 영상 감상에서 조금 더 익숙하고 구체적인 방식을 통해 감상의 지평을 넓혀준다. 이로써 창작의 주체는 셋으로 확장되고 감상의 단서 역시 풍부해진다.

 

연주자들의 선명한 주황색 작업복

 

연주자들에게는 무대가 일터이고, 연주가 그들의 작업이다. 일반적인 연주회에서 볼 수 있는 연주자들의 턱시도와 드레스는 사실 그들의 작업복이다. 그러나 전혀 작업복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서양의 화려한 파티에서나 볼 법한 의상이기 때문이다. 이 연주복은 연주에 환상적 요소를 더하는데 도움이 된다. 무대는 비현실적인 어떤 특별한 일이 벌어지는 공간이 된다. 앙상블이나 오케스트라 같은 경우와 달리 독주나 협연의 경우에는 특히 의상에 민감해진다. 아무리 의상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일상복을 입고 무대에 오르는 경우는 없다. 같은 맥락으로 독주나 협연의 경우에는 악보를 놓고 보는 것도 금기시 되어있다. 악보를 보는 과정은 무대 뒤에서 끝내고, 무대 위에서는 마치 음악이 연주자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처럼 연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화음프로젝트 Op.212’에서는 연주자들이 영상에서 나온 주황색 작업복을 입고 무대에 섰다. 이것은 영상 속 작업자들의 일이나 연주자들의 일이 작업이라는 측면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작곡가의 뚜렷한 정체성과 작업

 

이날 무대에서 작곡가 장석진은 유일하게 정장을 입었다. 영상 속 작업자들과 무대 위 모든 연주자들이 선명한 주황색 작업복을 입었기 때문에 그의 검은 정장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일반적인 연주회에서 작곡가는 연주자의 연주나 악보 안에서만 존재한다. 현존하는 작곡가의 작품을 연주할 때는 연주가 다 끝난 후 객석에 있던 작곡가가 무대에 올라와서 인사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 작곡가는 무대 왼편에 작곡가의 작업실 같은 공간을 만들었다. 무대 정면에는 영상이 나오는 스크린이, 무대 중앙에는 화음챔버오케스트라가, 무대 왼쪽에는 작곡가 장석진의 작업 공간이 배치됐다. 공연의 이 세 축은 긴밀히 연결돼 있으면서도 독립적이었다.

 

작업 공간에서는 피아노와 전자음악 기기들, 각종 악기들이 작곡가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중심에서 그는 온갖 작업 도구를 사용해 자연의 음향이나 사실적 소리 같은 효과음, 추상적이고 현대적인 사운드를 비롯해 존 케이지, 에릭 사티, 아르보 패르트, 쇼스타코비치 등의 작곡가나 뉴에이지, 후기 낭만주의를 연상시키는 다양한 음악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작곡가의 작업은 도구를 통해 소리를 창조하는 일이라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었다.

 

정연두 작가의 작품은 무성필름, 즉 소리가 없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야기가 느슨하게 엮인 구조이다. 여기에 음악이 들어가며 이야기는 새로운 흐름을 가지게 됐다. 할리우드 영화 같은 상업 영화에서는 영상과 음악이 대체로 일치한다. 그들의 지향점은 하나다. 극적 감동을 주는 것. 음악은 영상에서 무엇을 어떻게 느껴야 할지 암시하고, 묘사하고, 그 감정을 극대화한다. 음악이 영상을 설명하는데 주력하면 영화는 한결 쉽게 설득력을 가진다. 그러나 화음프로젝트 Op.212’에서의 지향점은 좀 다르다. 영상과 음악은 크게 하나의 흐름 안에서 흘러가지만 음악은 영상에 종속되지 않고 또 다른 맥락을 만들어간다. 음악과 영상은 지속적으로 거리를 둔다. 이러한 거리감은 몰입을 방해하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의 극적 긴장감이 생긴다.

 

화음프로젝트 Op.212’는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만약 작품이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면 출입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날 작품이 상영되는 인터미션 없는 8418초의 시간 동안 관객은 눈앞의 움직임과 소리에 집중할 수밖에 없고, 그 시간을 의미 있는 시간으로 채우기 위해 자신의 상상력과 이해력을 총동원하게 된다.

 

음악들

 

화음프로젝트 Op.212’의 음악에는 예술성과 대중성이 고루 담겨있다. 오프닝 장면에 쓴 음악을 포함해서 몇 곡은 상상력을 충분히 자극해 독립적으로 쓰여도 좋을 음악으로 여겨졌다. 또한 비오는 약국 거리에 남녀가 서있는 풍경 등에는 즉각적인 호소력을 지닌 감상적인 음악이 쓰여 정서적 충족감을 주었다. 각 장면에서 음악이 시작되기 전에 울리는 반복적인 음은 고여 있는 공기를 고동치게 했으며, 음향 효과에 중점을 둔 부분들은 공간에 생기와 색채감을 더했다.

 

오프닝 이후에 침묵을 다룬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영상 시작과 함께 흐르던 음악이 멈춘다. 공연장에는 적막이 흐른다. 영상속 사람들은 부지런히 움직이는데 응당 나야하는 소리가 나지 않고, 무대 위에는 연주자들과 악기가 가득한데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무대가 침묵에 잠기자 박수 칠 때를 제외하고는 공연장에서 소리의 주체가 되어본 적이 없는 관객석에서는 주변이 내는 소리를 예민하게 의식하기 시작한다. 기이한 긴장감이 불편해질 무렵 음악이 다시 들어온다. 사실 이 사일런스는 원작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의 가장 핵심적인 사운드이기도 하다. 작곡가는 음악 사이에 침묵을 삽입해 이 소리 없음의 효과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인식·각인시켰다.

 

영상 초반의 아버지의 집과 약국거리 장면에서는 음악이 들어가거나 사라지는 타이밍 역시 아주 자연스러웠다. 영상과 음악이 잘 어우러져 적절한 자극과 긴장감, 서술적 효과를 만들었다. 그런데 영상 중반에 진입하는 시골 농촌 풍경부터 음악은 작곡가가 생각하는 예술적 이미지를 소리로 그려낸 것으로 보였다. 즉 풍경이 아닌 풍경이 촉발하는 작가적 상상력으로 작곡가의 시선이 이동한 것이다. 평화로운 농촌 풍경을 배경으로 급박한 사운드가 울리는가 하면, 정적인 목장이나 숲 속에서 격동적인 움직임이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향토적 풍경을 배경으로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선율을 노래하기도 한다. 이때 이국적인 언어로 긴 낭독이 덧입혀지는데(이것은 불가리아어로 시편 23,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여호와를 노래하는 구절을 담은 것이라고 한다), 이 낭독 또한 울림과 뉘앙스가 풍부해 일종의 음악처럼 들렸다.

 

이 이질적인 음악과 울림들은 가 본적 없는 세계에 대한 그리움 같은 독특한 정서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숲 속에서는 짙은 낭만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왔으며, 안개 자욱한 산 정상에서는 신비로움이 감돌았다. 지속적으로 강조하듯, 작곡가가 해석한 노스탤지어는 영상의 흐름과는 또 다른 결이다. 따라서 관객들은 보이는 영상의 의미와 들리는 음악의 의도를 계속해서 연결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영상과 음악은 각 작가의 노스탤지어에 대한 거대한 은유다. 이 두 은유의 세계가 공존하는 화음프로젝트 Op.212’는 관객에게 부단한 해석 작업을 요구한다.

 

작업의 절정, 엔딩 크레딧

 

일반 영화관에서 대개 엔딩 크레딧은 영화의 일부로 존중받지 못한다. 불은 환히 켜지고 극장문은 열린다. 영화 제작에 참여한 이들의 명단이 자막에 오르는 이 시간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라는 신호 정도로 여겨진다. 그런데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의 엔딩 크레딧은 스크린으로 자막 처리돼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블라인드와 도르래, 사람의 손이 등장한다. 그 손으로 도르래를 일일이 돌려서 블라인드에 적힌 작업자들의 이름을 보여주는 작업이 행해진다. 이때 음악은 역동적인 음악을 재현하는데, 속도감이 더해지며 전체 영상에서 가장 극적인 음악을 들려준다. 도르래를 열심히 돌리는 손, 힘차게 움직이는 연주자들의 팔은 인간의 노동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화음프로젝트 Op.212’는 사람의 작업이 집약된 엔딩 크레딧으로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에필로그

 

화음프로젝트 아카데미의 실험에 속하는 화음프로젝트 Op.212’202132일 오후 730분에 예술의 전당 IBK홀에 공연되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쳤다. 2020716일에 작품 공모 공지가 나가고, 2020817일 오후3시에 한남동 다세대아트싸롱에서 작품 공모 설명회가 열렸다. 공모에 참여하는 작곡가들을 위한 이 설명회에서는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의 일부분을 보고 정연두 작가가 작품의 배경, 의도, 의미, 작품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후에 이어진 질문시간에 다수의 작곡가들이 활발히 참여하며 열기를 띠었다. 화음챔버에서는 20201025일에 작품을 마감한 후, 다음 날인 1026일부터 심사를 시작해서 최종 심사는 1113일에 이루어졌다.

 

20201113일 예술의 전당에서 화음챔버의 예술감독 박상연과 미디어아티스트 정연두, 당선 작곡가 장석진, 그리고 평론가인 필자가 참여해 작품의 전반적인 방향에 대해서 함께 논의했다. 필자가 보기에 이 좌담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참가한 이들 모두가 전적으로 평등했다는 것이다. 강한 주장과 약한 주장이 있다면 흔히 설득의 과정을 거친다. 강한 주장이 약한 주장에 행사하는 이 설득에는 한편으로는 힘의 논리가 작용한다. 그러나 이날 네 명의 대화는 여기에서 자유로웠다. 각자의 입장과 전문 분야가 다른 만큼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고 경청하는 분위기였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편의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하거나 동감하는 것도 아니었다. 한 개의 사안에 대해 네 개의 의견이 있었고, 그것은 의견의 대립이 아닌 시각의 차이로 수용됐다.

 

정연두 작가와 작곡가 장석진이 작품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입장 차이는 더 명확했다. 노스탤지어라는 주제 자체가 작가들에게는 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각자가 풀어가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고, 그 결과물은 화음프로젝트 Op.212’로 나타났다.

 

연주를 앞두고 필자는 화음챔버의 리허설에 참관했다. 연주자들의 작업은 분명했다. 영상음악이라고 해도 본질적으로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악보에 표기된 음을 음악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연주자들에게 제일 중요한 일이자 핵심적인 작업이다. 음악이 어느 장면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영상의 의미는 무엇인지 작곡가의 의도는 무엇인지 등 개개인 연주자가 전체 맥락을 얼마나 이해하는가는 각자의 몫이었다. 작가와 작곡가의 경우처럼 협업은 하되 합의할 의무는 없는 예술가들 고유의 영역이기도 하다. ‘화음프로젝트 Op.212’에 참여한 이 세 예술 주체, 즉 작가, 작곡가, 연주자들은 각자의 작업에 각자의 방식으로 충실했다. 이 최선의 작업들을 어떻게 이어서 어떤 이야기로 만들 것인가는 관객의 작업으로 남는다.

 

서주원 (bwv1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