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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2013 화음프로젝트 페스티벌 평론 "송주호 - 나를 찾은 시간"
송주호 / 2013-12-16 / HIT : 710

 

나를 찾은 시간

 

|송주호

 

 

음악에 대한 이런 저런 말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문학을 언급하기도 하고, 미술과 비교하기도 하며, 어떤 경우에는 음식에 빗대기도 한다. 전혀 다른 감각으로 접수되는 신호들이지만, 머리 어디선가 이를 같은 카테고리로 분류하고 정리하고 있는 것일까? 스크랴빈이나 메시앙과 같이 공감각(共感覺)을 지닌 천재적인 별종이 아닌데도 말이다.

 

어쨌든 서로 다른 감각들의 연결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나타났다. 문학은 직접적으로 노래 가사가 되기도 하고, 줄거리가 되기도 했다. 낭만 시대에는 문학과 음악 중에 무엇이 더 위대한가가 논쟁이 되었던 모양인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카프리치오>에서 이 논쟁을 재밌게 다루었다. (이 오페라에서는 음악이 더 우세하게 진행되는 것 같지만, 끝내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반면에 음식 혹은 맛의 감각은 실재로 자주 표현되는 방법이지만, 실질적인 예술적 영향을 거의 주고받지는 못했다.

 

미술은 음악의 간접적인 영감이 되었다. 무소륵스키의 유명한 <전시회의 그림>도 그렇고, 칼 닐센의 <교향곡 2번 ‘네 가지의 기질’>, 드뷔시의 <바다>,윤이상의 <중국 그림> 등 많은 곡들이 그림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이런 특징은 문학과 음악의 경우와 비슷하지만, 문학과 달리 미술은 음악의 구조와 긴밀한 연관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다. 음악이 미술의 영향을 받는 방향으로 예술사가 진행되기는 했지만, 이 둘이 우위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래서인지 시각과 청각이 함께 있을 때 각각이 갖는 특징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협력적인 관계가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난 20세기 후반부터 부쩍 늘어난 음악과 영상, 혹은 음악과 미술의 협업은, 21세기의 오늘날에는 일반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직 국내에서는 이러한 작업이 ‘특별’한 것인데, 그런 면에서 ‘화음 프로젝트’는 세계적이면서도 미래적인 면모를 갖고 있다. 올 해의 ‘화음 프로젝트’ 역시 미술 작품으로부터 의뢰된 한국 작곡가의 작품들로 채워졌으며, 또한 재연과 초연을 적절히 배치하여 그 취지와 의도를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

 

올 해의 화음 프로젝트 프로그램을 받아 살펴보면서, 어느 때보다도 주제의식이 살아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마치 시사성 있는 다큐멘터리 페스티벌의 프로그램을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 다큐멘터리의 주제는 바로 ‘인간의 욕망’이었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사로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른 처지에서,적당히 알아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누군가는 편하고 부유하지만, 누군가는 힘들고 구속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 모두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 바로 욕망 때문이다. 어떤 이는 욕망을 이루지 못해 불행하고, 어떤 이는 욕망을 이루었지만 그 후의 허무감으로 불행하다.

 

그래도 그들은 욕망을 가졌다는 사실로 인간다운 모습을 소유한 인간들이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은 욕망 자체를 소유하지 못한 채, 오늘을 어제와 같이, 그리고 내 옆 사람과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내일도 오늘과 같이, 그리고 내일 만나게 될 사람과 비슷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나의 존재는 희미해져 가고, 어느 때인가 자신도 모르게 나는, 그리고 인간의 모습은 사라져 있을 것이다.

 

예술은 바로 이 지점에 나에게 소리친다. 나의 삶이 내게 주어진 세상에서 유일하며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미술이 이야기하는 메시지들, 그리고 음악이 전하는 메시지들은 욕망의 노예가 된 자신을, 혹은 욕망(혹은 꿈)이 사라지고 존재감을 잃은 자신을 되찾도록 안내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은, 그리고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은, 오늘날 만들어진 예술을, 그리고 이 땅에서 탄생된 예술을 반드시 보고 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혹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러한 외침 속에서 예술 또한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나는 화음 프로젝트에서 이러한 예술의 정체성을 본다,한 작곡가가 내게 반어적인 표현으로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한국 음악의 흐름이 어디에 있는가?” 하지만 나는 이 대답을 한 작곡가가 유학 중에 현지 친구들로부터 들었다는 말을 빌려 대답하고 싶다. “너희 나라에는 음악이 없어? 왜 이렇게 먼 곳까지 와서 음악을 배워?” 그리고 곧바로 화음 프로젝트에서 그 대답을 확인하게 된다.그러므로 김환기 선생이 주제가 되고, 신윤복의 미인도가 주제가 되는 것은 당연한 가치가 있으면서도 지극히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한국의 현대미술은 우리의 잃어버린 자아이며, 우리가 잊은 걸작은 이미 그 의미를 상실한 범작이 되고 만다. 교과서에서만 봤던 신윤복의 미인도. 그 속의 주인공이 만지고 있는 세 개의 구슬이 달린 노리개, 살짝 건들기만 해도 스르르 풀릴 것 같은 애매한 옷고름,그리고 왼쪽 팔 안쪽에서 내려오는 관능적인 붉은 색의 띠. 슬프게도 일제에 의한 역사의 단절과 권력에 의한 역사의 왜곡이 이들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하게 했지만, 이보다도 이들을 보지 못했던 우리들의 어두운 시야로 인해 우리는 슬퍼해야만 한다.

 

하지만 화음 프로젝트에서 탄생된 음악은 이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갖게 했으며, 오늘을 살아가기 위한 새로운 생명을 부여했다. 다섯 명의 작곡가들은 각자의 시각으로 오른쪽으로 시야를 회피한 미인도의 미인을 바라보며, 혹은 역시 회피된 시각으로 그녀 주변을 바라보며, 새로운 예술품을 만들었다.이수현은 그림에 담긴 한국적인 이미지를 민요풍으로 담아냈다면, 유진선은 오히려 배음렬을 이용한 현대적인 상징성을 부여했다. 조선희는 오히려 여백으로 시각을 돌려 음향의 여운을 의도했고, 석윤복은 미분음으로 미인도의 주인공이 보여주는 미묘한 긴장감을 표현했으며, 한대섭은 선적인 흐름으로 소리 그림을 그렸다.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나의 주제로 이토록 다양한 음악들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어떤 작곡가가 학창시절에 있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를 작곡하라는 과제를 받고 곡을 제출했는데, 다른 학생들은 모두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곡을 썼지만 자신만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곡을 썼다는 이야기. 그리고 퇴짜를 맞았다는 헛웃음 짓게 하는 후문.

 

예술은 더욱 당돌해져야 한다. 당돌함은 욕망과 꿈을 원료로 한다. 우리의 미술과 우리의 음악에는 채굴을 기다리는 이 원료가 많이 있다. 앞으로도 중요한 한국 음악 축제인 화음 페스티벌에서 연주될 많은 음악들로부터 다양하고 당돌한 메시지를 들을 수 있기를 믿는다. 그래서 다음 화음 페스티벌에서 또 다시 어느덧 잃어버린 나를 되찾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