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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畵/音.zine vol.7] 한국 사회와 음악가
이경분 / 2023-09-01 / HIT : 63

한국 사회와 음악가

이경분 (음악학박사.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객원연구원)

 


경이로운 한국음악가들

 

  한국의 최초 독일 유학생이었던 바이올리니스트 김재훈은 1920년대 우리가 서양음악을 제대로 연주하자면 100년이 걸려도 힘들 것이라는 절망에 사로잡힌 전망을 토로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오늘, 전 세계의 유명음악교육 기관이나 오케스트라에 한국 학생, 한국 단원이 없는 경우는 보기 드문 상황이 되었다. 세계적 콩쿠르 입상은 물론이고, 세계의 유명 음악 교육기관과 일류 콘서트홀까지 진출한 한국음악인들도 손꼽을 수 없이 많아졌다. 더욱이 최근에는 세계적 연주자들을 배출해내는 한국의 음악교육을 배우기 위해 오히려 역으로 구미의 음악도들이 한국을 방문하는 시대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클래식 음악계의 마지막 아성인 지휘영역에서도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한국 지휘자들이 늘어가는 추세이고, 서구음악계에서도 허들이 높은 여성 지휘자군에 한국 여성지휘자들이 놀라울 정도로 진취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100년 전에는 상상조차 못 할 일들이다. 김재훈이 환생하여 21세기의 한국음악계를 본다면 자신의 예측이 틀렸음에 매우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음악가들의 잠재력에 대해서는 김재훈과 다른 시각이 이미 1950년대에도 존재했다. 해방 후 미 군정기에 문교부 음악고문 및 공보원문화부장으로 근무했던 줄리아드 출신 피아니스트 헤이모위츠(Ely Haimowitz)가 세계 최빈국의 나라 한국에서 뛰어난 현대적 작품을 쓰는 김순남과 같은 작곡가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는 일화는 이미 잘 알려져있다. 헤이모비츠외에도 이 당시 환경과 시스템만 받쳐주면 훌륭하게 될 잠재력을 가진 한국인들이 많다고 생각한 외국인의 증언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세계적 대가가 된 윤이상

 

  개인의 잠재력과 시스템의 창의적 만남이 어떤 결과가 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는 윤이상일 것이다. 김순남과 동갑인 윤이상은 독일로 망명한 후, 세계적인 작곡가로 인정을 받았지만, 그는 부친의 반대와 경제적 어려움에도 힘들게 고학하면서 배움의 열정을 놓지 않았던 수많은 한국인 중 한 명에 속했다. 그러나, 창작과 비평과 연주 그리고 수준 높은 청중이라는 음악시스템이 원만하게 작동하는 독일에서 윤이상은 ‘동양음악을 서양어로 번역한 세계적인 음악가’라는 찬사를 받는 20세기 거장의 차원으로까지 재능을 펼칠 수 있었다. 만약 윤이상이 1959년 베를린음대를 졸업하고 바로 한국으로 돌아왔다면, 그의 작품세계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한국음악문화는 현대음악을 수용할 여유도, 연주자도, 청중도 없었다. 이런 환경에서 창작활동을 지속했다면, 윤이상이 수많은 훌륭한 작품을 창작했다고 해도 20세기 서구음악사의 대가로 인정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도쿄 신교향악단과 문학준

 

  또 다른 예로 바이올리니스트 문학준을 들 수 있다. 해방공간에서 윤이상이 통영과 부산에서 지역 예술인들과 어울릴 때, 김순남을 비롯한 일본음악학교 졸업생들은 서울에서 새로운 민족음악의 건설이라는 활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 시절, 일본에서 귀국한 문학준도 힘을 보탰다. 문학준은 1930년대 현제명의 지도하에 있었던 경성 연희전문학교의 학생오케스트라 멤버였는데, 가끔 경성 부민관에서 연주회를 했던 일본인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와니부치 겐슈(鰐淵賢舟)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레슨을 받는 정도였다. 1939년 독일유학은 커녕 일본유학도 제대로 하지 않았던 때, 문학준은 쟁쟁한 음악가도 들어가기 힘든 도쿄 신교향악단(NHK오케스트라의 전신)의 오디션에 합격했다. 당시 신교향악단은 유명한 독일지휘자 요제프 로젠슈토크(Joseph Rosenstock)의 지도하에 기본부터 체계를 잡아가던 시기였다. 능력 있는 음악가이지만 유대인이었던 로젠슈토크가 나치의 핍박을 피해 일본으로 온 덕분에 신교향악단은 탄탄한 기초작업을 바탕으로 오늘날 개성적인 음색을 자랑하는 NHK 오케스트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로젠슈토크는 매달 오디션을 실시하고 그 결과에 따라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자리가 바뀌는 시스템을 도입하였으므로, 단원들은 열심히 연습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9년 문학준이 신교향악단에 입단한 것은 경성음악계의 신선한 충격이었다. 1938년 베를린 유학에서 귀국한 유학파 바이올리니스트 안병소는 신교향악단의 단원이 되지 못하였던 반면, 연희전문학교 문과생이었던 문학준이 해낸 것이다.

 

 

해방공간의 최고 바이올리니스트 문학준

 

  문학준은 로젠슈토크 하에서 1939년부터 1945년까지, 햇수로는 7년을 신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리니스트로 연주하면서, 오케스트라의 조직과 훈련의 정석을 터득했다.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때, 당대 최고 바이올리니스트로 인정받았던 음악가는 1930년대 천재바이올리니스트로 촉망받고 독일에서 유학한 안병소가 아니라 문학준이었다. 안병소는 만주국의 신생 오케스트라인 신징오케스트라의 콘서트마스트로 큰소리치며 활동했던 반면, 문학준은 동아시아의 최고로 손꼽히던 신교향악단에서 매달 로젠슈토크의 오디션을 받아야 하는 시스템에서 연습에 연습으로 눈부신 도약을 했던 것이다.

 

  해방공간에서 문학준은 고려교향악단과 서울교향악단의 콘서트마스터로 오케스트라의 음향을 이끌어나갔고, ‘문학준현악4중주단’을 결성하여 해방공간의 클래식 음악문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낯선 이름

 

  하지만, 문학준의 이름이 우리에게 낯선 이유는 육이오 전쟁이 터지자, 문학준이 제자 한 명과 함께 삼팔선을 넘어갔기 때문이다. 월북의 동기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국민보도연맹에 이름이 등록된 문학준이 남한에 남았더라도 전쟁통에 살아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고 강석희 선생은 고등학생시절, 진보적인 미술교사가 전쟁통에 우익 학생에게 맞아 죽었다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그만큼 무서운 시절이었다. 육이오 때 인민군이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자, 국민보도연맹 회원들이 인민군과 협력할지 모른다는 의구심만으로 수만에서 수십만명이 영문도 모른 채 경산 코발트광산, 대전 산내 골령골, 대구 달성군 가창골 등으로 끌려가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보도연맹 회원들 대다수는 야학에 참석한 노동자, 농민 등 순박한 사람들이었고, 보도연맹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신청서에 도장을 찍은 경우가 태반이었다.

 

  문학준은 목숨을 건졌지만, 월북으로 인해 사라진 일류 음악가 중 한 명이다. 분단이 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음악이 다른 예술분야보다 자율미학적 성격이 강하다고 해도, 음악가들이 시스템과 사회적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그 결과는 각 개인마다 천차만별일 것이다.

 

 

잊혀진 음악가

 

  분단과 남북의 적대적 관계에서 고향에 갈 수 없었던 윤이상과 문학준. 두 사람은 평양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다. 윤이상은 1982년 제1회 윤이상음악회 개최를 위해 평양에 왔고, 평양의 문학준은 아직 살아 있었다. 특히 해방공간에서 ‘문학준현악4중주단’에서 함께 연주했던 문학준의 제자이자 미국 피바디 음대 교수로 활동하던 안용구가 윤이상의 부탁을 받고 이 때 평양에 왔다. 안용구를 매개로 윤이상과 문학준은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또는 안용구의 주선이 아니더라도, 만약 문학준이 1980년대에도 북한음악계의 중요한 인물이었다면, 윤이상과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안용구는 문학준을 개인적으로 만났을 정도로 문학준은 북한음악계에서 잊혀진 인물이 되어 버렸다.

 

  월북 후 초기 북한의 교향악단 운동에서 문학준은 중요한 실력자로서 1960년대 공훈배우 칭호를 받고 평양음대 교수로 활동했으나, 그것은 1960년대까지였다. 이후 천리마 시대의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서구음악숭배자’로 비판의 대상이 된 문학준은 북한음악계에서 기피자가 된 듯하다. 1980년대 말 그가 사망한 후, 북한의 엘리트 음악잡지 『음악세계』에 문학준을 기리는 에세이는 커녕 부고를 알리는 기사조차 없다. 안기영이 죽었을 때, 또는 지휘자 김기덕이나 바이올리니스트 백고산이 사망했을 때, 그들에 대한 회고 에세이가 어김없이 게재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제자들도 문학준에게서 배운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없는 분위기였는지 제자들의 회고문도 보이지 않는다. 안용구가 1990년대초 다시 평양을 방문했을 때, 스승 문학준의 안부를 문의한 후에야 부고 사실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사회와 음악가

 

  한국근현대사에는 억울하고 안타까운 운명의 인물들이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근현대음악사에도 분단으로 인해 좌절되고 왜곡되거나 잊혀진 음악가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월북’은 수많은 음악가들을 삼켜버리는 블랙홀과 같았다. 문학준이나 김순남외에도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뛰어난 음악가들 대부분이 월북 후 북한에서 제대로 자신의 창의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사라지거나 도태되었다. 21세기 한국음악가들의 세계적 도약이 경이로우면 경이로울수록, 흙과 거름이 되고 뿌리가 되었을 20세기 척박한 식민지시기, 분단과 전쟁시기를 살았던 잊혀진 남북 음악가들의 존재가 더욱 귀하게 여겨진다. [畵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