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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정화된 밤>의 동상이몽
성혜영 / 2010-10-14 / HIT : 472

2010년 10월 14일 한국일보에 실린 성혜영 선생님의 화음쳄버오케스트라 9월30일 연주 관련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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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과 색, 형태 등 감관에 의존하는 예술은 가을에 특히 호소력이 큰 것일까. 가을이 오면 눈과 귀가 밝아지는 느낌이다. '마음의 현'(心琴)도 팽팽해진다. 고맙게도 음악회도 전시회도 풍성하다. 

음악과 미술의 소통을 추구해 온 화음쳄버오케스트라를 호암아트홀 가을 실내악 축제에서 '정화된 밤'으로 다시 만났다. 미술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곡을 위촉하고 그 작품이 있는 현장에서 연주해 온, 음(音)을 그리는(畵) 실험적인 '화음(畵音) 프로젝트'는 평소 청각보다는 시각 이미지에 익숙한 내게도 무척 신선한 자극이었다. 덕분에 현대음악의 불편함도 얼마간 해소시킬 수 있었던 친절한 연주 단체로 기억에 남아 있다. 

화음 프로젝트로 작곡된 임지선의 <그림자의 그림자>와 함께 기대되는 곡은 쇤베르크의 <정화된 밤>이다. 무조음악으로 현대음악의 난해성에 대한 악명을 떠안고 있는 곡이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곡의 모태가 리하르트 데멜의 시라는 점, 쇤베르크 자신이 표현주의 화가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표현수단을 달리하는 음악과 미술과 문학의 이미지는 어떻게 다르고 또 어떻게 만나는지도 궁금했다. 

임지선의 <그림자의 그림자>의 모티브는 조각가 이재효의 작품이다. 나뭇가지와 못 등, 하찮아 보이는 자연의 재료들이 얽히고설켜 마침내 우주적 구형으로 완성된 그의 조각은 제 각각의 음으로 치환되어 또 다른 생명을 얻는다. 곡에 인용된 선율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의 끝나지 않는 이야기처럼, 갈피갈피의 사연들이 혼돈 속에 스미고 간섭하면서 그림자는 깊어진다. 현과 현, 음과 음, 시간과 시간이 부딪치며 만들어 내는 깊은 그림자는 역설적으로 빛의 갈망으로 들린다. 

쇤베르크가 무조음악의 주제로 리하르트 데멜의 <정화된 밤>을 선택한 것은 자연스럽다. 낙엽 진 싸늘한 숲 속을 산책하는 연인,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고 고백하는 여자, 달빛 속을 헤매는 어두운 눈빛은 고전적 서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음산한 풍경이다. 끝내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연인들의 해피엔딩이지만, 정말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달빛으로 정화된 새 생명에의 기쁨이 아니라 그 고요한 달빛이 품고 있는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고뇌, 상처의 소용돌이가 아니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베토벤의 <월광>과는 달라야 했을 것이다. 고통과 기쁨, 열정과 회한들이 날것 그대로 춤추는 판타지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마침내 <정화된 밤>은 하찮은 못과 나뭇가지가 이루어낸 우주적 원형이고, 음과 음의 갈등으로 깊어진 그림자 속에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빛이기도 했다. 그 아름다움은 어떻게 오는가. 시처럼 사랑처럼 혁명처럼 오는가. 견딜 수 없을 만치 고통스럽던 시간을 지나 시처럼 오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던가. 사랑과 혁명, 그 모든 것은 비로소 끝장이 나면서 온다던가.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다. 그것은 '제 얼굴마저 스스로 뭉개버릴 때/ 와서 이제 겨우 시작'(이원규)이라니. 

쇤베르크는 예술이란 자기 자신을 그 운명에 적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맞붙어 씨름하는 사람들의 호소라고 했다. 그 호소의 생명력이 바로 예술의 생명력이기도 할 것이다. 비겁하고 소심한 우리를 대신해 누구보다 아프게 싸워야 하는 것이 예술가의 숙명이라면 숙명일 터. 음과 음 사이에서, 색과 색 사이에서, 낱말과 낱말 사이에서 그들의 씨름은 오늘도 내일도 끝나지 않으리라. 가을 밤의 동상이몽은 그렇게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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