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畵/音.zine vol.12] 공감각의 미적분에 관하여
임야비 / 2024-12-01 / HIT : 272
공감각의 미적분에 관하여
임야비(소설가, 극작가, 총체극단 ‘여집합’ 단장)
미분과 적분
숫자와 수식을 쓰지 않고 글로 표현해 보겠다. 미분은 잘게 나누는 것이고, 적분은 잘게 나뉜 것을 쌓는 것이다. 시간에 넣어보자. 찰나를 적분하면 영원이 되고, 영원을 미분하면 찰나가 된다. 공간을 넣어보자. 우주를 미분하면 원자나 양자가 될 것이고, 이것을 적분하면 다시 우주가 될 것이다. 이제는 차원을 넣어보자. 입체의 부피를 미분하면 겉넓이가 되고, 넓이를 미분하면 둘레의 길이가 된다. 반대 방향도 마찬가지다. 점을 쌓으면 길이가 되고, 길이를 쌓으면 넓이가 되며 넓이를 쌓으면 부피가 된다. 차원을 넘는다. 좌표의 위치를 미분하면 순간의 속도가 되고, 속도를 적분하면 위치가 된다. 이렇게 미분과 적분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다. 이 원리를 감각에 적용할 수 있을까?
미술과 음악
예술은 공간과 시간을 점유한다. 익숙한 인지의 틀 안에서 미술 작품과 음악 작품을 대차 대조해 보자.
미술 작품은 공간에 고정된 물질이고 시각을 자극한다. 음악 작품은 시간을 흐르는 울림이며 청각을 자극한다. 여기까지는 큰 무리 없다. 자, 그럼 미적분 관계에 미술의 공간과 음악의 시간을 대입해 보자. 힘들다면 시각과 청각을 넣어도 상관없다. 혹시나 해서 다시 말하지만, 이 글은 수학적 원칙을 도출하려는 해제가 아니고, 화(畵)와 음(音)의 ‘관계’를 어렴풋이 상상해 보는 문(文)이다. 이 흥미로운 관계를 상상했던 화가와 작곡가의 몇몇 예를 아래에 열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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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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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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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3)
미술을 미분해 시간을 만든 작곡가
무소르그스키는 친구이자 화가인 빅토르 하르트만의 추모 전시회에 다녀온 후 ‘전람회의 그림’을 작곡한다.(fig.1) 에피소드도, 음악도 워낙 유명해 달리 설명이 필요치 않지만, 꼭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음악의 재료가 된 하르트만의 그림이 대부분 소실되어 현재는 볼 수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 감각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무소르그스키가 공들여 묘사한 울림만으로 시각적 상상을 끄집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드뷔시의 교향시 ‘바다’도 미술에 영향을 받은 음악으로 널리 알려진 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일본 판화(우키요에)가 유행이었는데, 드뷔시는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를 보고 음악을 착상했다.(fig.2) 그리고 1905년 드뷔시에 의해 미분된 시각은 교향시 ‘바다’의 알록달록한 음들이 된다. 인상주의의 복판에서 청각과 시각의 관계에 주목했던 드뷔시는 이 작품에 ‘3개의 교향적 소묘 (trois esquisses symphoniques pour orchestre)’라는 부제를 달았는데, 이는 미술의 시각을 음악의 청각에 담았다는 것을 명시한 것이다.
라흐마니노프는 스위스 화가 뵈클린의 그림 ‘죽음의 섬’을 본 후, 1908년 동명의 교향시를 작곡한다. (fig.3) 가단조의 음울한 울림은 그림의 전체 분위기는 물론 세부까지 탁월하게 묘사한다.
이렇게 작곡가들은 미술-공간-고정-물질-시각을 미분하여 음악-시간-흐름-울림-청각으로 변환한다. 이제 고막과 망막의 경계는 모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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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4) 백색의 교향곡 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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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5) 브람스 현악 6중주 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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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6) Involution
음악을 적분해 공간을 만든 화가
19세기 말 미국 미술계에서는 토널리즘(Tonalism)이 대유행이었다. ‘Tonal’이란 단어에는 ‘음조’와 ‘색조’라는 의미가 공존한다. 토널리즘의 중심에 있었던 화가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는 공감각이라는 사조에 충실했다.(fig.4) 그는 작품의 제목을 ‘교향곡’, ‘야상곡’, ‘변주곡’ 등 악곡의 형식으로 붙이곤 했는데, 음악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알리고 싶은 강한 의도일 것이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화가 어니스틴 타헤들(E. Tahedl; *1940)은 ‘브람스 현악 육중주 1번’, ‘슈베르트 현악 사중주 15번 3악장 스케르초’, ‘바그너 라인의 황금’, ‘브루크너 교향곡 7번 2악장 아다지오’처럼 아예 작곡가의 이름과 작품명을 그림의 제목으로 정한다.(fig.5) 타헤들은 음악의 흐름을 색으로 포착하고 쌓아 올려 공간에 고정한다. 참신한 시도이긴 하지만 유명하고 익숙한 음악에 비해 그림이 너무 생소하고 추상적이라 감각의 심연까지 파고들지는 못한다.
재미 한인 조각가 존 배(John Pai; *1937)는 시공간 적분의 심오한 영역까지 도달한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바흐의 대위법을 철사로 만들고 싶었다’, ‘내 작품은 하나의 음표에서 시작한다’라고 말했다. 철사를 용접한 작품 Involution(1974)은 점, 선, 면이 혼재하면서 안과 겉이 공존한다.(fig.6) 수학처럼 구조적이고 음악처럼 유연한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안구 뒷면에 망막이 아닌 고막이 깔리고 수학의 음악 ‘푸가(Fuga)’가 울린다.
많은 화가가 음악-시간-흐름-울림-청각을 적분해 미술-공간-고정-물질-시각으로 물화한다. 이렇게 시신경과 청신경이 합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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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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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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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9)
칸딘스키 - 동시 미분 그리고 총체 적분
미술의 미분인 음악, 음악의 적분인 미술. 지나친 도식화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이렇게까지 기술한 이유는 칸딘스키 때문이다. 칸딘스키 예술의 시작은 총체 예술의 원류인 작곡가 바그너였다. 출발점부터 남달랐던 칸딘스키에게 시각과 청각은 본디 하나의 감각이었다. 그래서 ‘화가 칸딘스키’는 음악과 미술을 동시에 미분해 추상으로 재조합했다. 그는 ‘원안의 원들’에서 음악의 음색, 음정, 음량, 박자를 미술의 점, 선, 면, 색상, 채도, 명도로 포획했다.(fig.7) ‘총체 예술가 칸딘스키’는 미술의 바그너를 자처했다. 그가 1912년 발간한 예술 연감 ‘청기사’에는 마르크, 마케를 비롯한 화가들의 작품은 물론 작곡가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베버른의 악보가 실려 있으며, 쿠즈민의 시와 괴테의 인용문까지 수록되어 있다.(fig.8) 여기에 칸딘스키가 직접 극작한 총체극 ‘노란 소리’의 대본이 마지막 장을 장식한다. 한마디로 칸딘스키의 청기사는 음악, 미술, 문학, 연극을 모두 적분한 총체 예술서다. 이렇게 화가 칸딘스키, 총체 예술가 칸딘스키는 대차 대조표를 찢어 버린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을 담을 그릇이 필요했다. ‘이론가 칸딘스키’는 자신의 예술론을 언어라는 그릇에 담아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점∙선∙면’을 집필한다.(fig.9)
던져진 질문
예술의 감각과 수학의 논리가 겹치는 협소한 교집합이 존재한다. 그 교집합은 시간과 공간을 포함한다. 그것을 미분과 적분으로 파헤쳐 보았다. 하지만 예술을 수학으로 온전히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미적분은 시각과 청각의 함수 관계를 분석하는 하나의 방법론일 뿐이다.
미분과 적분이 사라진다 해도 수는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시각 기관과 청각 기관이 없다고 공간과 물질 그리고 시간과 울림의 존재가 부정되는 건 아니다. 이것을 기초로 재미있는 질문들을 던져본다. 혹시 우리 주변에 놀랄만한 예술이 널려있지만, 감각 기관의 한계로 알아채지 못한 상태로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만약 공감각의 영역이 넓어진다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예술에 감응할 수 있을까?
미술을 소리로 미분한 작곡가의 음악, 음악을 형태와 색으로 적분한 화가의 작품 그리고 칸딘스키의 전방위적 실험이 바로 이 질문에 답하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이제 ‘뭐에 영향을 받은 뭐’, ‘뭐를 오마쥬한 뭐’가 아닌 ‘뭐와 뭐가 동시에 만들어져 총체적으로 공존하는 공감각 예술’ 즉, 미적분이 필요 없는 예술이 필요하다. 과학에서 시간과 공간이 얽힌 시공간 개념이 밝혀졌듯이, 칸딘스키가 접근한 시각과 청각의 공감각 또한 명확해질 것이다. 하지만 아직 연구도, 이론도, 작품도 부족하다. 질문은 던져졌다. 이제 더 많은 시도가 필요하다. [畵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