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글로벌메뉴



평론상수상작

[2016 화음 평론상 입상작][화음쳄버오케스트라 -쇼스타코비치 쳄버심포니 시리즈Ⅳ]음악을 통해 증언하기
서주원 / 2016-08-02 / HIT : 614

 

 <2016 화음 평론상 입상작>

 

음악을 통해 증언하기

화음쳄버오케스트라- <쇼스타코비치 쳄버심포니 시리즈Ⅳ>

 - 서주원

 

1. 억압하는 사회, 억압하지 않는 음악

 

 

“음악은 한 인간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조명해준다. 그것은 인간의 마지막 희망이며 마지막 피난처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반쯤 미쳤고 짐승이며 백정인 스탈린조차도 음악속에서 그런 면모를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그는 음악을 두려워하고 싫어한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구술 자서전인 <증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음악은 단지 음악일 뿐이 아니다. 그것은 강력한 힘이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억압적인 사회에서 역설적으로 음악의 가능성을 나타내보였다. 창작과 감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폭력적인 사회에서 음악은 삶과 세상을 깊게 성찰함으로써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억압된 인간과 현실의 모습을 드러내준다.

 

한 시대의 증인으로 음악을 통해 증언한 쇼스타코비치. 그는 국가가 예술과 예술가를 탄압한 시대를 살아간 대표적인 작곡가이다. 구소련에서는 인민 대중에 의해 지지되고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음악만이 가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일견 정당해 보이지만, 사실은 스탈린을 위시한 특정한 권력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즉 스탈린의 정책을 찬양하는 작곡가는 정부의 지지를 받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가혹한 숙청의 대상이 됐다. 작품에 대한 당의 평가에 따라서 쇼스타코비치는 영광과 오욕 사이를 오가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렇지만 쇼스타코비치는 그의 작품이 서랍 밖으로 나올 수 있을지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작품을 썼다. 그것이 그가 작곡가로서 가지고 있는 정체성이자 음악가로서 사회에 대응하는 방식이었다. 인간을 억압하는 사회에서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 음악으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듣는 것조차 불온한 것으로 여겨 금지됐던 시대가 우리에게서 멀지 않다. 그의 음악적 증언을 듣는 것은 음악과 사회에 대해 질문하는 효과적인 방식이 될 수 있다.

 

 

2. 연주를 통한 모색

 

 

화음쳄버오케스트라는 제37회 정기연주회부터 쇼스타코비치의 현악사중주 15곡 전곡을 쳄버 심포니로 편곡해서 연주하는 ‘쇼스타코비치 쳄버심포니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다. 2016년 6월 30일 예술의 전당 IBK챔버홀에서 열린 화음쳄버오케스트라 제40회 정기연주회의 주제는 ‘쇼스타코비치 쳄버심포니 시리즈Ⅳ’였다. 쇼스타코비치의 현악사중주는 격변하는 혼돈의 시대를 관통하며 내면세계를 진지하게 성찰한 작곡가의 음악적 고백록이다. 이 작품들은 당시 사회가 그에게 요구한 대규모의 영웅적인 선전용 작품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현악사중주에는 그가 음악가로서 누릴 수 있는 창작의 자유와 어두운 시대의 그림자가 명암으로 존재한다. 이 작품들이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 시대를 사는 깨어있는 예술가로서 음악가의 내면풍경을 생생하게 그려냈기 때문일 것이다. 쇼스타코비치가 가진 치열한 문제의식을 그의 작품을 통해 되짚은 것은 여전히 혼돈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작업이다.

 

쇼스타코비치 쳄버심포니 시리즈의 네 번째 연주회에서는 쇼스타코비치의 ‘실내교향곡 F#단조, Op.108(현악사중주 7번 편곡)’과 함께 C. Ph. E. 바흐의 ‘교향곡 4번 A장조, Wq.182(H.660)’와 임지선의 ‘화음 프로젝트 Op.62 <그림자의 그림자>’, 그리고 베토벤의 ‘현악사중주 11번 F단조 Op.95 <세리오소>’가 연주됐다. 화음쳄버오케스트라는 쇼스타코비치 시리즈를 시작하는 2012년 8월 18일 첫 회 연주회부터 이 시리즈를 기획한 의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쇼스타코비치는 20세기 혁명과 전쟁, 냉전 시대에 활동하며 ‘음악과 권력’이란 화두에 가장 상징적인 작곡가이다. 이 프로젝트는 그의 현악 4중주 전곡을 연주함으로써 환경이 예술가의 삶과 예술에 어떻게 반영 되는지 이해하고, 단순히 개인적 희로애락이 아닌 시대의 정치, 문화적 흐름을 읽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이러한 기획의도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 날 연주된 곡목들이 쇼스타코비치와 비견되는 삶과 음악에서의 치열함이나 기존의 권력이나 억압적 상황을 극복하려는 도전을 담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들었고, 이 궁금증이 연주를 통해 해소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한 기대를 가지게 됐다.

 

첫 곡은 1773년에 작곡된 C. Ph. E. 바흐의 ‘교향곡 4번 A장조, Wq.182(H.660)’으로 산뜻하게 시작했다. 활기차고 즐거운 분위기의 이 곡은 여느 연주회였다면 쉽게 수용했을 작품이었지만, 특별한 시리즈의 첫 곡으로써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약간은 들뜬 상태로 진행되는 연주를 들으며 C. Ph. E. 바흐가 평생 극복하려고 했던 아버지 바흐, 즉 J. S. 바흐에 대한 고민과 투쟁, 또는 바로크 시대에서 고전주의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역동성과 추동력이 이 작품 안에 담겨있는지에 대한 생각이 이어졌다.

 

화음쳄버오케스트라는 다음 연주곡인 쇼스타코비치에서 훨씬 밀도 있는 연주를 들려주었다. 쇼스타코비치의 ‘실내교향곡 F#단조, Op.108’은 그의 실내교향곡(현악사중주) 중 가장 짧고 함축적인 작품이다. 네 대의 악기로 구성된 현악사중주 연주에 비해 쳄버오케스트라의 연주는 훨씬 선이 굵직하고 음향은 풍성했다. 간결하지만 편안한 진행은 아니기 때문에 중단 없이 연주되는 전체 3악장 동안 긴장감이 감돌았다. 화음쳄버오케스트라는 정교하고 세련된 멋을 살리기보다는 힘이 실린 거친 결로 작품을 표현했다. 그런데 이날 시리즈의 중심 작품이었던 만큼 내밀하고 응축된 악상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기 위한 여유가 충분하지 못한 것과, 짧은 연주시간에 아쉬움이 남았다.

 

다음 작품인 ‘화음 프로젝트 Op.62 <그림자의 그림자>’는 작곡가 임지선이 조각가 이재효의 작품 <0121-1110=108021>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창작된 곡이다. 나무의 나이테에서 살아있는 다양한 소리의 결을 듣는 예술적 상상력은 음악작품에 담겨 새로운 공명을 일으켰다. 화음쳄버오케스트라는 미술 작품을 주제로 작곡한 작품을 전시가 오픈될 때 해당 전시공간에서 초연하는 ‘화음 프로젝트’에 그치지 않고 재연하는 ‘화음프로젝트 페스티발’로 확장시키며 작품에 대한 거리감을 좁혀나가고 있다. 많이 접할수록 친밀해지고 이해력의 폭이 넓어지기 마련이다. 흔히 현대음악의 낯섦이 난해함으로 여겨지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벗어나 음악작품만을 연주하는 기회를 지속적으로 갖는 것도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렇지만 음악만으로도 충분한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완성도 높은 창작과 연주, 그리고 작품의 색채가 전체 프로그램과 얼마나 조화를 이루는지에 대해서는 화음쳄버오케스트라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영역으로 보인다.

 

마지막 연주곡인 말러가 편곡한 베토벤의 ‘현악사중주 11번 F단조 Op.95 <세리오소>’에서는 안정된 호흡과 노련한 실력이 돋보였다. <세리오소>는 베토벤의 중기 현악사중주의 마지막 작품으로, 1810년에 작곡한 베토벤이 발표를 미루다 1814년에야 초연했을 만큼 진보적인 성격이 강하다. 단도직입적으로 제시되는 첫 악장, 과감한 형식의 변형과 실험, 대담하고 거침없는 전조, 악장 간 구분의 모호함 등은 베토벤이 잘 다듬어지고 균형잡힌 고전적 전통을 해체하는 새로운 길로 들어섰음을 나타낸다. 이 작품은 중기를 지나 후기에 이른 작곡가의 절박한 고뇌와 심각함이 배어있는 음악적 선언문인 것이다. 화음쳄버오케스트라는 작품이 지닌 이 같은 성격을 생생하게 살려냈다. 역동적인 선율과 명료한 리듬, 충만한 화음으로 치밀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음향을 만들었다.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는 명확한 전달로 이어진다. 단원들은 지휘자가 없는 가운데서도 서로 자유롭고 유연하게 시선을 맞춰가며 강한 일체감과 집중력을 보여주었다. 확신있는 연주만이 청중을 설득시킨다. 상대를 납득시킬만한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상호간 효과적인 소통을 위한 기본전제가 된다.

 

 

3. 보다 성숙한 소통을 향해

 

 

쇼스타코비치는 혼돈의 시기에 반성적인 성찰을 통해 발전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예술가의 존재가 절실함을 그의 삶과 음악으로 증명했다. 그런데 예술의 자유로움과 다양성이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보장된다는 현대에 실제로는 여전히 제한된 레퍼토리가 고정적으로 창작, 연주, 감상되고 있다. 창작자나 연주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보다는 스스로를 검열하며 예술 활동을 제한하기도 한다. 이렇게 예술가가 위축되거나 자신을 기만할 때 음악적인 진정성과 진실에서는 점점 멀어지게 되고,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며 변화를 이끌어내기가 어렵게 된다.

 

음악가의 진정성과 음악적 진실은 결국 작품에 담기게 되고 음악을 통해 세상에 드러난다. 쇼스타코비치가 남긴 음악은 우리에게 예술의 본질적인 힘이 다각적인 시각과 다양한 표현방식을 통해 사회를 비판하고 사회 문제를 이해, 재인식할 수 있게 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환기시키는데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점에서 음악가들의 역할은 중대하다. 몇 세기 전의 작품이든 오늘날의 작품이든 그들의 연주에 의해 지금 여기에서 살아나기 때문이다.

 

“날다 공중에서 떨어져 죽듯 연주하라. 그렇지 않으면 청중들은 완전히 지루해져 연주장을 떠날 것이다.” 이 말은 연주자들에 대한 쇼스타코비치의 요구이다. 쇼스타코비치가 이 말을 통해 강조한 것은 바로 생명력일 것이다. 벼려진 정신과 날카로운 감각만이 둔한 정신과 무뎌진 감성을 뚫을 수 있다. 쇼스타코비치의 일침은 눈만 뜨면 볼거리와 들을 거리가 가득한 세상에서 클래식 음악이 살아남을 수 있는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현대음악이란 어렵고 지루하다는 인식이 여전히 강한 현실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무엇보다도 창작의 즐거움, 연주의 즐거움, 감상의 즐거움을 회복시켜야 한다. 음악에 담긴 심오한 의도와 의미를 표현하는데 의의를 두는 것만으로는 외면하는 청중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사회에서 음악이 가지는 가치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가치판단은 매우 복합적인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숙하고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는 예술가들의 존재가 더욱 필요하다.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예술은 우리의 삶의 지각을 회복시켜주고 우리가 사물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점에서 음악과 미술, 전시장과 연주회장, 옛 음악과 새 음악의 경계를 허물고 소통의 영역을 다양하게 확장해가는 화음쳄버오케스트라의 활동은 단연 주목할 만하다.

 

그렇지만 이 지점에서 화음쳄버오케스트라가 풀어가야 할 숙제가 있다. 화음쳄버오케스트라가 야심차게 준비한 쇼스타코비치 시리즈가 과연 얼마나 기획의도를 잘 살렸는지에 대한 것이다. 화음이 이 시리즈의 기획의도를 처음부터 분명하게 표방하고 있는 만큼, 프로그램에서부터 기획 의도가 잘 드러나고 연주를 통해 그 의미가 더 명확하게 전달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연주회를 시작하며 가졌던 궁금증, 즉 쇼스타코비치 시리즈에 다양한 프로그램이 들어간 이유를 연주회를 마치고도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감상자는 연주를 이해하려는 접점을 끊임없이 찾는다. 만약에 프로그램 구성을 이같이 한 동기가 확실하다면, 그리고 그 이면에 더욱 심오한 뜻이 있었다면 더 적극적으로 표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제 화음쳄버오케스트라가 쇼스타코비치 쳄버심포니 시리즈를 하는 목적부터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이번 연주회에서 C. Ph. E. 바흐부터 베토벤, 쇼스타코비치, 임지선 등을 ‘쇼스타코비치 쳄버심포니 시리즈Ⅳ’의 범주에 넣었는데, 이러한 시대별 열거 방식으로는 중심 주제를 효과적으로 부각할 수 없다. 또한 아무리 뛰어난 연주단체라 하더라도 바로크부터 현대까지 모든 레퍼토리에서 강점을 보이기는 어렵다는 현실적인 이유에서도 그러하다. 이날 가장 완성도 높은 인상적인 연주를 보여준 작품이 후반부에 단독으로 연주된 베토벤의 작품이었다는 것에 오히려 아쉬움이 남는다. 이날 연주회가 쇼스타코비치 시리즈인 만큼, 자칫 중심 주제를 가리는 역할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처럼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의 연주시간이 10분을 조금 넘는 짧은 경우에는 쇼스타코비치 작품의 비중을 좀 더 늘리는 것도 주제를 살리며 균형을 맞추는데 효과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화음쳄버오케스트라는 쇼스타코비치 시리즈에서 2012년, 2014년, 2015년에 걸쳐 쇼스타코비치 현악사중주를 각 연주회마다 한 작품씩 연주했다. 결국 15개로 이루어진 쇼스타코비치의 현악사중주를 거의 1년에 한 작품씩만 다루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추세라면 이 프로젝트를 통해 큰 영향력을 미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안팎으로 몰입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쇼스타코비치 시리즈에 선택하는 화음 프로젝트 작품에 대한 고민도 더 필요하다고 본다. 이 작품들이 얼마나 이 시리즈의 기획의도와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연주를 통해 얼마나 잘 드러나는지에 대해 더 심도있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청중과의 소통을 위해 C. Ph. E. 바흐와 같이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친숙하고 쉽게 감상할 수 있는 음악을 프로그램 안에 배치하는 것도 나름의 의미는 있겠지만, 어렵더라도 연주와 청취의 의미를 부각시켜서 이 시리즈의 본질을 더 잘 드러나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어떨까? 쇼스타코비치의 현악사중주 전곡을 현악교향곡으로 듣는 것의 특별한 의미와 가치를 감상을 통해서 충분히 깨달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연주회의 구상에서부터 연주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관통하는 화음쳄버오케스트라만의 정체성이 확고한가에 대한 문제로 귀결된다.

 

화음쳄버오케스트라 단원들 개개인의 역량이 뛰어나며 이들이 함께하는 연주가 탁월한 것은 이미 증명된 바이다. 그렇지만 안정기에 할 일은 안주하지 않는 것이다. 척박한 환경에서 뚝심있게 뚫고 왔던 에너지는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원동력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 더욱 확고한 정체성과 신념, 그리고 용기가 필요하다. 더 중요한 것에 더 집중하기 위해서이다. 지금까지 화음오케스트라가 보인 역량과 성취를 생각했을 때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것이 화음이 우리 음악계의 진정한 ‘리더그룹’으로써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법정에서 쓰였던 ‘증인’이라는 말은 자신이 목격한 것을 진실하게 진술하는 것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증인의 헬라어 마르투스(martus)는 이후에 순교자(martyr)라는 뜻으로까지 쓰이게 됐다.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생존이 걸린 억압적인 상황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음악으로 증언했음을 기억하자. 기존 음악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며 성장해온 화음오케스트라가 이제 더욱 분명한 가치판단과 입장표명을 함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예술을 통한 성숙한 논의와 소통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 

 

 

 

* 2016 화음 평론상 입상 

서주원 프로필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음악학 전공 전문사 졸업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서양음악사 전공 박사과정 재학 중 

2009년 - 2010년 <음악저널>에 작곡가 재발견 시리즈 기고

2010년  <피아노 음악>, <스트링 앤 보우>에 작곡가 집중 분석, 작품분석, 음악가 인터뷰, '서주원의 음악 에세이(시리즈), 연주회 리뷰 기고

2014년 <Wind &> 특집 인터뷰와 리뷰 기고

2015년 <객석>에 연주회 리뷰 기고